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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 | 밥통 101호

2022.02 | 90호밥통 책방 | 폭력의 위상학 /안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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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위상학 

한병철 지음, 김영사



너무 가깝고 빈번한 폭력들 속에서, 폭력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까? 

새해, <폭력의 위상학>을 들었다.


저자는 “폭력의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 주인과 노예,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되는 단계에 이르러 완결된다”고 폭력의 위상학적 변화와 현대의 완결적 모습을 선언한다. 중심과 주변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개개인이 중심인 신자유주의 성과주체들의 사회에서 가시적 폭력은 적어진 듯 보이나 실은 자유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많이 겪는 소진증후군과 우을증이 스스로 폭력의 구조에 옭아맨 결과가 아닌지 묻는다.  


이러한 진단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한편, 신자유주의 성과주체 중심의 사회에서도 한층 더 주변화 되어 있는 주체들은 이 진단에서 세심하게 다뤄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저자의 폭력의 위상에 대한 진단보다 더 주목이 가는 건, 어떤 대안의 방향과 관련된 문장들이었다. 곱씹어 볼 문장들의 메모를 소개하며, 가시화된, 그리고 비가시화된 폭력과 차별, 배제의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운동과 정치의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면 어떨까 청해본다. 



p. 94-95

정치는 중개다. 정치의 중개 작용이 미치는 범위는 법질서, 심지어 정의의 영역까지도 넘어서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우정은 중재기능에 있어서 법과 정의를 능가한다. 

...

우정은 어떤 면에서 정치적인 것의 징표이다. 공동체 자체가 "뭔가 우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매우 근본적인, 실존적인 차원의 문제로 이해한다. 우정은 "함께 살겠다는 자유로운 결정"으로서, 그런 점에서 국가의 기반, 국가가 성립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강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은 지배 권력을 행사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함께 살겠다는 결단이다. 인간의 삶은 목숨을 좌우하는 무조건적 권력에 내맡겨짐으로써 정치화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살겠다는 결정이 인간 존재를 정치화 한다. 



p. 97

진정 정치적인 것은 "공공의 복리"를 지향하는 복합적인 중개의 구조다. "국가"는 함께 살겠다는 정치적 결단에 의해 생겨나고 존속한다. 법질서를 지키는 주권자의 폭력을 홉스는 "violence(폭력)"이라 부르지 않고 "common power(공동권력)" 이라고 부른다. 정치적 권력은 이러한 공동의 것(common)에서, 즉 공통의 의지에 따라 함께 행동하기에서 나온다.



p.114

폭력은 언제나 내면을 가진 자를 겨냥한다. 돌을 부수는 것은 아직 폭력이라고 할 수 없다. 내면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나 시스템도 내면을 지닌다. 자신을 향한 자기중심적 노력, 자기 정립은 이들의 고유한 특성에 속한다. 외부로부터 파괴적으로 개입해 들어오는 폭력은 내면의 해체를 초래한다. 폭력은 자신은 정립하는 자아를 제자리에서 이탈시킨다. 그래서 폭력은 그렇게 경악스러운 것이다. 정립은 언제나 자리박탈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폭력과 달리 권력은 경악스럽지 않다. 권력은 정립적이기 때문이다. 연속성, 내면, 정립이 권력의 과정을 규정한다. 반면 불연속성, 내면의 해체, 탈정립은 폭력의 구조적 상수에 속한다. 



p.163

라틴어표현 'communicare'는 함께 뭔가를 하다, 합하다, 주다, 공유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를 수립하는 행위다. 그러나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면 커뮤니케이션도 더 이상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그저 스스로를 누적해갈 뿐이다. 

...

언어의 스팸화는 자아의 비대화와 결부된 현상이다. 자아의 비대화는 공허한 커뮤니케이션을 낳는다.




안소정


밥통을 지지하는 시흥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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