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뿌려지든 품고 자라게 하는 흙
밧데리를 늘 100% 채워진 채 방전 없는 일정을 소화하며 지내던 어느 날 문득 신호대기 중 옆 차로의 차로 시선을 돌렸다. 옆 차의 커다란 바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생기 잃은 몸짓으로 빽빽하게 실려 어디론가 옮겨지는 닭들이다. 높고 촘촘하게 짜여 진 철망안의 닭들은 칸칸이 위 아래 옆으로 조금의 여유 공간도 없이 도로의 매연과 소음과 바람을 견뎌내고 있다. 바람에 닭털은 날린다. 나의 기도 스멀스멀 빠져 날라가는 것 같다. 하루종일 초점 잃은 눈을 가진 닭들이 머릿속에 남은 채로 퇴근을 했다. 아파트 주차장에 이르러 ‘아~ 위 아래 옆으로 촘촘히 박혀서 사는 건 닭이나 나나 같은 신세구나.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기가 스멀스멀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시멘트 독이 쌓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소름이 돋았다. 문득 흙을 밟고 싶어졌다. 온종일 돌아다녀도 흙을 밟은 적이 없어 신발 바닥은 흙 한 톨의 흔적도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도시로 전학을 간 후 일본어 교사한테 제일 먼저 들은 나를 부르는 호칭은 ‘촌놈’이었다. 내게 던져진 촌놈이란 호칭이 그 당시에도 그닥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래 난 촌놈이다. 흙밭에서 놀고 먹고 자랐다. 흙 냄새가 그리웠고 흙의 감촉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아파트란 공간을 버리고 시골살이를 선택했다. 누군가는 흙을 밟을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한 나에게 ‘애들 교육을 포기한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생각이 다르고 생각을 나눈들 상대가 바뀔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생각에 내 결정이 바뀌지 않듯 그들 또한 그럴 것이기에 굳이 애써 설명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인간을 끊임없이 우열을 나뉘게 하는 경쟁교육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옮겨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야’라고 속으로 답한다.
철마다 해마다 들판의 풍경은 다르다. 맨손으로, 맨발로 흙을 느끼며 자연과 대화를 한다. 모래알같은 씨앗을 뿌리며 ‘잘 키워줘’ ‘잘 자라나거라’ 말하면 어느덧 마른 흙에 실금을 내며 봉긋이 솟아오르는 싹은 늘 감동이다. 이 땅의 모든 새 생명의 탄생은 사람이나 식물이나 예쁘고 신비롭고 감동이다. 흙은 뿌린 대로 거두게 해 준다. 무엇을 뿌릴지는 인간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무엇이 뿌려지든 품고 자라게 하는 것은 흙이다. 인간의 손길은 단지 거드는 것 뿐이다. 흙은 씨앗을 차별하지 않는다. 씨앗들끼리 서로 먼저 햇볕을 받고 자라겠다고 경쟁하고 상대를 덮어버릴 뿐이다. 무엇을 거두어 먹을지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며 제거하거나 키운다. 마늘밭에 자라나는 환삼덩굴 새싹을 뽑아내며 ‘미안, 여기는 마늘이 주인이야. 다른 곳에 태어나지 그랬니.’ 말하면서도 나의 논리가 인간사에 빗대보면 그 또한 공정하지 못하니 우울해진다. 우울해지는 마음을 흙 한줌 코 끝에 대어주며 위로한다. 도시의 삶에서 한 끼의 식탁에 오른 밥과 반찬에 감사의 마음을 가져본 기억이 별로 없다. 시골살이로 자연에 내 손길을 더하여 자란 푸성귀들로 차려진 밥상에 늘 감사한 마음이 생겨난다. 오늘도 부추 겉절이, 상추와 미나리 쌈으로 입안 가득 나의 손길과 자연의 내어줌에 감사한 마음 그득하다. 새 씨앗을 받아 낼 준비를 마친 저 밭고랑에 무엇이 뿌려질까? 그게 무엇이든 흙은 다 품을 것이고, 빛과 바람과 비의 기운을 얻어 푸르게 덮여질 것이다. 그 모양새를 보며 나는 감동하겠지.
글. 박정옥
강화도에서 땅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밥통을 후원하고 있다
무엇이 뿌려지든 품고 자라게 하는 흙
밧데리를 늘 100% 채워진 채 방전 없는 일정을 소화하며 지내던 어느 날 문득 신호대기 중 옆 차로의 차로 시선을 돌렸다. 옆 차의 커다란 바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생기 잃은 몸짓으로 빽빽하게 실려 어디론가 옮겨지는 닭들이다. 높고 촘촘하게 짜여 진 철망안의 닭들은 칸칸이 위 아래 옆으로 조금의 여유 공간도 없이 도로의 매연과 소음과 바람을 견뎌내고 있다. 바람에 닭털은 날린다. 나의 기도 스멀스멀 빠져 날라가는 것 같다. 하루종일 초점 잃은 눈을 가진 닭들이 머릿속에 남은 채로 퇴근을 했다. 아파트 주차장에 이르러 ‘아~ 위 아래 옆으로 촘촘히 박혀서 사는 건 닭이나 나나 같은 신세구나.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기가 스멀스멀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시멘트 독이 쌓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소름이 돋았다. 문득 흙을 밟고 싶어졌다. 온종일 돌아다녀도 흙을 밟은 적이 없어 신발 바닥은 흙 한 톨의 흔적도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도시로 전학을 간 후 일본어 교사한테 제일 먼저 들은 나를 부르는 호칭은 ‘촌놈’이었다. 내게 던져진 촌놈이란 호칭이 그 당시에도 그닥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래 난 촌놈이다. 흙밭에서 놀고 먹고 자랐다. 흙 냄새가 그리웠고 흙의 감촉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아파트란 공간을 버리고 시골살이를 선택했다. 누군가는 흙을 밟을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한 나에게 ‘애들 교육을 포기한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생각이 다르고 생각을 나눈들 상대가 바뀔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생각에 내 결정이 바뀌지 않듯 그들 또한 그럴 것이기에 굳이 애써 설명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인간을 끊임없이 우열을 나뉘게 하는 경쟁교육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옮겨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야’라고 속으로 답한다.
철마다 해마다 들판의 풍경은 다르다. 맨손으로, 맨발로 흙을 느끼며 자연과 대화를 한다. 모래알같은 씨앗을 뿌리며 ‘잘 키워줘’ ‘잘 자라나거라’ 말하면 어느덧 마른 흙에 실금을 내며 봉긋이 솟아오르는 싹은 늘 감동이다. 이 땅의 모든 새 생명의 탄생은 사람이나 식물이나 예쁘고 신비롭고 감동이다. 흙은 뿌린 대로 거두게 해 준다. 무엇을 뿌릴지는 인간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무엇이 뿌려지든 품고 자라게 하는 것은 흙이다. 인간의 손길은 단지 거드는 것 뿐이다. 흙은 씨앗을 차별하지 않는다. 씨앗들끼리 서로 먼저 햇볕을 받고 자라겠다고 경쟁하고 상대를 덮어버릴 뿐이다. 무엇을 거두어 먹을지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며 제거하거나 키운다. 마늘밭에 자라나는 환삼덩굴 새싹을 뽑아내며 ‘미안, 여기는 마늘이 주인이야. 다른 곳에 태어나지 그랬니.’ 말하면서도 나의 논리가 인간사에 빗대보면 그 또한 공정하지 못하니 우울해진다. 우울해지는 마음을 흙 한줌 코 끝에 대어주며 위로한다. 도시의 삶에서 한 끼의 식탁에 오른 밥과 반찬에 감사의 마음을 가져본 기억이 별로 없다. 시골살이로 자연에 내 손길을 더하여 자란 푸성귀들로 차려진 밥상에 늘 감사한 마음이 생겨난다. 오늘도 부추 겉절이, 상추와 미나리 쌈으로 입안 가득 나의 손길과 자연의 내어줌에 감사한 마음 그득하다. 새 씨앗을 받아 낼 준비를 마친 저 밭고랑에 무엇이 뿌려질까? 그게 무엇이든 흙은 다 품을 것이고, 빛과 바람과 비의 기운을 얻어 푸르게 덮여질 것이다. 그 모양새를 보며 나는 감동하겠지.
글. 박정옥
강화도에서 땅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밥통을 후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