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2024.03 | 밥통 115호

23.01 | 101호밥통 10년 특집 | 간담회 - 밥통 10년, 지금 우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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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통 10년 특집호



특집 contents


간담회 

  밥통 10년, 지금 우리의 이야기 


연대 응원의 글

  - 박경석(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

  - 김동철(밥통 조합원, 기아 노조 활동가)

  - 박호준(밥알단, 티브로드 노조 활동가)

  - 김종아(이소선합창단 대표) 

  - 차헌호(금속노조 구미지부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 지회장)

  - 허지희(전국서비스노조 세종호텔지부 사무국장)

  - 김계월(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케이오 지부장)

  - 김정은(밥알단, 신천연합병원 활동가)






간담회

밥통 10년, 지금 우리의 이야기



장소  천강에 비친 달(인사동)

일시  2022. 12. 14 오후 6시~10시

참석  김수영(밥통 이사장, 집행위원)

         김종민(밥통 감사, 집행위원)

         신태섭(밥통 이사, 집행위원)

         박경열(밥통 이사, 집행위원)

         정상천(밥통 집행위원장)

         현은희(밥알단, 밥통 집행위원)

         이림(웹진 디자이너, 밥통 집행위원)

         박민선(밥통 상근활동가, 집행위원)

        

진행  한광주(밥통 편집장, 집행위원 )

기록 및 정리  한광주(밥통 편집장)



한광주  2022년은 ‘밥통 10년’의 해입니다. 특별한 행사를 마련하지는 않더라도, 10년 동안 해 온 우리 활동에 대해 한번 짚고는 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에 밥통 집행위원들과 간담회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 ‘밥통’은 서울은 물론 경기, 충청, 전, 경상, 제주에 이르기까지 부당한 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 노란 밥차를 타고 달렸습니다. 그러면서 마주한 많은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다 할 수는 없지만, 밥통 집행위원들이 활동하면서 가져온 생각과 지금의 마음을 잠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0년이라는 두꺼운 시간


김종민  10년이라는 게 전혀 감이 안 느껴져요. 뭔가를 닥쳐서야 해결했던 일들이 있었고, 매번 순간순간을 모면하면서 지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요. 새삼 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밥통이 만들어지자마자 삼성전자 서비스지회 노조원들이 팔백 명씩 3교대로 서울에 올라가서 노숙 농성을 하셨지요. 그분들의 밥을 하루 세 끼를 해드리던, 진짜 그 처절했던 시간들이 막 생각이 나요. 그렇게 지내온 우여곡절의 시간 끝에, 또 하나의 밥차, 경남밥통이 달리는 상황까지 되다 보니 그 감회가 좀 새로운 건 있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많은 분들이 마음을 모아주셨고, 지금 밥통 후원자들 중에서 처음부터 쭉 후원해 주시는 분들 꽤 많거든요. 변함없이 함께 곁을 지켜준 분들을 생각하면, 굉장히 그 두꺼운 시간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주셨고, 변함없이 함께 곁을 지켜준 분들을 생각하면, 굉장히 그 두꺼운 시간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종민 밥통 감사


한광주  맞아요, 그냥 지나간 시간은 아닌 것 같아요. 10년 동안 흔들림 없이 후원해주신 분들, 현장에서 함께해 주신 밥알단 분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지요.


김수영 하다 보니까 벌써 10년이네요.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자리에 밥통의 법적 첫 소유권자  밥통 첫 이사, 밥통의 첫 집행위원장, 밥통의 첫 감사, 초창기서부터 계속 이렇게 운영회의를 해 주셨던 분들이 계시네요. 이후 결합하신 분들도 계시구요. 이렇게 10년이 되었는 줄 몰랐어요. 새삼 감회가 새롭습니다.


박경열  2013년이었지요. 갑자기 제게 인감을 좀 떼라고….(웃음) 투쟁하는 사업장에 밥 한 끼 나누자는 말이 참 인상적으로 다가왔어요. 의미있고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협동조합 ‘밥통’ 설립에 필요한 절차로) 인감을 떼어드리면서 모든 것에 동의하고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그 때가 40대 말인가 그랬는데 지금 50대가 훅 지나버린 지금도, 의미있는 일을 해서 그런가, 마음은 똑같은 것 같아요. 지난 10년 동안 저는 출동 현장에 그렇게 많이 가보지 않았습니다만 감사로서, 이사로서, 밥통을 이어가는 일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렇게 앞서서 해주신 분들 덕분 아니겠나 싶어요. 

그동안 이 밥통이 빨리 없어지는 세상이 오기를 바랐는데, 아직도 우리가 아직 할 일이 참 많네요. 지금부터 한 2~3년 안에, 그러니까 우리가 정년이 되기 전까지는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데, 그러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이런 생각이 좀 듭니다.


투쟁하는 사업장에 밥 한 끼 나누자는 말, 참 의미있고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모든 것에 동의하고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박경열 밥통 이사


신태섭  저 역시 별로 한 일이 없어서…. 그런 믿음은 있었어요.  여기 함께하시는 분들이 좋은 마음을 가지고 힘든 일을 내 일처럼 해 주시는 걸 보고, 세상이 이런 분들로 다 구성돼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10년이라는 게 금방 가네요.


한광주  사실 한 일이 없다고들 얘기를 하지만, 꼭 필요할 때마다 함께해 주셨어요. 신태섭님만 해도 밥통부엌에 와서 칼도 갈아주고 냉장고도 같이 들여주고, 요긴한 출동도 함께해 주시고요. 우리가 다들 밥통에 미안한 마음은 한 자락씩은 갖고 있어요. 근데 또 필요한 지점에서 또 이렇게 할 일을 해주시고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좀 같이 해 봅니다.


여기 함께하시는 분들이 좋은 마음을 가지고 힘든 일을 내 일처럼 하시는 걸 보고, 세상이 이런 분들로 다 구성돼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어요. 

-신태섭 밥통 이사


현은희  그 마음을 요즘 제가 알겠어요. 제가 최근 일을 시작하다보니 출동을 자주 못 하잖아요. 일하다가도 이 시간이면 밥통 가서 출동 준비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광주  현은희님도 밥알단으로 활동하신 지 꽤 되었지요?


현은희  밥통이 벌써 10년 됐다는 게 솔직히 잘 안 믿겨요. 저는 2017년도 광화문 전장연 출동 때 처음 갔는데, 그때는 정말 사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뭐 이거 해야 돼요 하면 옆에서 막 도와주는 그런 입장이었어요. 지금 5년이 넘었는데 정말 5년 같지 않은 시간이 지나간 거예요. 

사실 저는 투쟁이라는 걸 잘 몰랐어요. 해고당했으면 그냥 다른 직장 가서 구해서 그냥 일하고 살면 되지 않아 왜 굳이 저렇게 힘들게 싸우는지 이해가 안 갔을 정도였어요. 그랬는데 제가 그 현장을 가서 직접 부딪히고 밥연대를 하면서 느낀 게, 여태까지 일하던 직장에서 아무 잘못 없이 해고를 당하면 그분들이 일해온 시간을 부정당하는 거잖아요. 오랜 투쟁 현장에 가면 되게 마음이 아파요. 반면에 투쟁했던 분들이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 때 그때 정말 뿌듯하지요. 힘도 있고 보람도 있고 그래서 제가 여태까지 꾸준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여기 계신 원년 멤버에 비하면…


신태섭  시간은 중요한 게 아니지요. 그 마음이 귀한 거지요.


현은희  토대를 마련해 주셔서 저희가 열심히 연대할 수 있는 거였잖아요. 더 열심히 해보려구요. 그래서 정말 말씀대로 밥통 더 이상 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는 투쟁이라는 걸 잘 몰랐어요. 왜 굳이 저렇게 힘들게 싸우는지 이해가 안 갔을 정도였어요. 그랬는데 제가 그 현장에 가서 밥연대를 하면서 느낀 게, 아무 잘못 없이 해고를 당하면 그분들이 일해온 시간을 부정당하는 거잖아요. 

-현은희 밥통 집행위원


한광주  운동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밥통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밥통 활동을 통해서 하면서 운동의 의미를 찾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밥통 10년은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또 어떤 지점에서 지금 이 자리처럼 밥통 활동의 의미를 한번 더 새기면서 열심히 좀 해 보자는 마음을 공유하고, 나 밥통인이야 하는 거를 새삼 깨달아 보기도 하고요.  


이림  저는 웹진 리뉴얼하면서부터 같이 합류했는데 출동은 사실 거의 못했고… 웹진 디자인만 해왔어요. 


한광주  밥통 부엌에서 비빔밥도 만들고 다 했잖아요?


이림  거의 안 한 것 같아요.(웃음) 밥통이 오래됐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매달 때가 되면 글들 모인 거 편집하면서 저도 사실 크게 뭔가 의미 부여라든지 뭔가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었어요. 그 글들을 받아서 읽으면서 편집하는 게 저한테는 참 좋은 것 같더라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출동하면 더 가깝게 느끼고, 그냥 매달 글과 소식 이런 거 받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출동 현장에 직접 가거나 필자를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으로 관계가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서 웹진이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매달 때가 되면 밥통 글 모인 거 읽으면서 편집하는 게 저한테는 되게 좋더고요. 마음으로 관계가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 같아서, 그런 부분에서 웹진이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다는 생각이에요. 

-이림 웹진 디자이너



사람들의 마음이 이어지고 이어져 여기까지


한광주  밥통 상근자 박민선 님은 어떤 마음이실까요? 


박민선  제가 있기 전에 있었던 지난 8-9년의 시간이 어땠는지가 사뭇 궁금하고요. 사실 저는 항상 좀 마음에 걸리는 게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밥통의 취지에 맞게 가고 있는 건지 하는 거에요. 간간히 얘기는 듣지만 실제 경험한 거하고 같을 수 없을 테니까, 어쨌든 이 10년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게 지금의 제 역할이겠다 싶은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정상천  저 역시 밥통이 10년이나 되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어요. 제가 또 그런 걸 잘 못 챙겨요. 의례 기념일 예를 들면 100호 이런 거에 무감한 편이에요. 사람들의 마음이 이어지고 이어져 여기까지 온 것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드물게 잘 온 것 같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서 그 잘 오는 과정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자부심도 조금 있고 또 예전에 있었던 분들 보고도 싶고 그러네요. 지금 역대로 가장 적은 인원이 지금 밥통 출동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출동하시는 분들한테 너무 죄송하고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드네요.


사실 저는 항상 좀 마음에 걸리는 게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밥통의 취지에 맞게 가고 있는 건지 하는 거에요. 10년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게 지금의 제 역할이겠다 싶은 생각입니다.  

-박민선 반통 상근활동가


김수영  제가 첫 집행위원장이긴 했지만 정상천 동지가 거의 일을 같이 했습니다. 처음에는 되게 소박하게 시작했고, 지금도 소박하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이 기회를 통해서 다 만났어요. 이런 연대의 기운들이 점점 퍼져나가면서 잘 지속된 게 진짜 좋은 사람들이 같이 해서 그런 거 같아요. 좋은 사람들이 같이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할 수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좋은 동지들하고 10년을 같이 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신태섭 동지한테 되게 고마웠던 게, 밥차를 처음 마련할 때 소유자로 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빨리 조퇴하고 인감 떼서 올라오라고 전화했어요. 그랬더니 금방 올라와가지고 인수 절차를 다 했거든요. 


신태섭  우리가 또 순발력은 굉장히 강하거든요.(웃음) 


김수영  그 다음에 집행위원회 체계를 만들었는데, 종민 동지가 첫 밥통에 전체적인 기획의 골격을 다 짰고,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이 체계의 틀을 만든 사람은 또 정상천 동지였지요. 이런 동지들이 없었으면 밥통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지지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고마운 마음이지요. 제가 특별히 한 일은 별로 없어서요. 


정상천  밥통 이전에도 밥차가 있었어요. 두 번의 시도가 있었고 또 지금 우리랑 같은 시기에 시작한 밥차가 있었고 아래 지역에 또 다른 밥차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운영이 어려워서 더 이상 지속이 못하게 되는 상황을 봤고요. 그래서 우리는 이걸 극복해보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기획 과정에서 이 밥통을 지속 가능한 상태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한 거거든요. 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물적 마음적으로 힘을 모아주셔서 그 설계대로 이렇게 쭉 오다 보니까 10년을 오게 된 힘이 되었다는 생각을 해요. 


밥통 이전에도 밥차가 있었어요. 우리는 기획 과정에서 이 밥통을 지속 가능한 상태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한 거거든요. 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힘을 모아주셨고, 그 설계대로 쭉 오다 보니까 10년이 되었다는 생각을 해요.




밥통의 시작-지속 가능한 밥차를 만들자


한광주  많은 분들의 귀한 마음이 모여 큰 힘이 되었지요. 밥통 활동을 하다보면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밥통은 어떻게 만들어진 거에요?" 하는. 밥통의 시작 이야기를 해 볼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초창기부터 활동했던 동지들이 각자 하는 대답들이 좀 있긴 할 거예요. 이번에 그 얘기를 좀 정확하게 한번 정리해 봤으면 좋겠어요. 


정상천  내용을 정리하기 어려워요. 협동조합 등록은 2014년에 했는데, 그 이전의 활동은 만나서 말로만 하고 기록을 따로 안 했기 때문에 각자의 기억밖에 없어요. 밥통을 최초로 제안한 사람은 김수영 이사장님이에요. 


김수영  그 때가 쌍차 투쟁이 처음에 시작될 때였지요. 한두 번 쌍차 투쟁을 하면서 밥차가 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걸 진보신당에서 한번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당시 진보신당 내부 사정에 어려움이 있어 성사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밥차가 하나 만들어졌는데 이 역시 이러이러한 어려움으로 운영이 중지된 상황이었어요. 


좋은 사람들이 밥통을 통해서 만났고 이런 연대의 기운들이 퍼져나가면서 잘 지속해 온 게, 진짜 좋은 사람들이 같이 해서 그런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좋은 동지들하고 10년을 같이 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정상천  밥차를 한다는 게 차도 사야 되고 사람도 있어야 하고 돈이 드는 일인데, 기존의 몇몇 밥차들처럼 하면 몇 달 하다가 또 어려워진다, 그래서 처음부터 오래 갈 수 있는 설계가 필요하다,  이 구조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했지요. 설계를 잘 하는 김종민 선배가 협동조합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제안을 했어요.


신태섭  그 당시에 사회적 기업이니 이런 얘기를 많이 하고 있을 때였어요.


김수영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할 때 의견 그룹인 ‘무사연’ 사람들한테 밥에 관심 있는 사람 다 모여라 해서 회의를 했어요. 


정상천  그렇게 그림을 그렸는데 문제는 이제 돈을 구해야 되잖아요. 대기업 공장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간략한 브리핑 자료를 만들어 기아자동차 노조 분들을 만났지요. 


김수영  그때 기아 노조원 일부가 ‘더불어’라는 조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는데, 이 조직에서 기아노조 사람들에게 제안을 했고, 이 과정에서 밥통 초대 이사장인 하상수 동지와 (전)감사인 정식화 동지가 이후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었지요. 


신태섭  하상수 전 이사장이 초창기에 기아자동차 대의원대회장에 후원회 가입 신청서를 가져와서 쫙 돌리면서 단상에 올라가, 우리가 다양하게 연대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제안을 했어요. 그 때 나도 대의원이었으니까 뭐 크게 한 건 없지만 하여튼 함께 설득을 해서 그때 꽤 많은 후원회 가입을 받았어요. 그 때 가입한 후원회원 중 많은 분들이 아직도 후원을 해주고 계시지요. 


운동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밥통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밥통 활동을 통해서 하면서 운동의 의미를 찾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밥통 10년은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한광주 밥통 편집장




밥, 밥이 절실했던 노숙 투쟁 현장


한광주  밥통 초기 활동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김종민  배경은 비극인데, 당시에는 노숙 투쟁이 많은 시기였어요.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서 정말 장시간 버텨야 하는 운동이 너무 처절하게 진행되었지요. 그 과정에서 먹는 문제는 심각한 일이었지요. 밥통이 만들어지고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출동을 나갔던 게 삼성전자 서비스 때였어요. 2,400명의 조합원이 3교대로 한 번에 800명씩 상경해서 노숙투쟁을 하는데, 그 때가 세 번째 상경이었어요. 그 앞 두 번 상경 투쟁은 다 보름을 못 넘기고 내려갔는데 그 이유가 밥값 때문이라는 거에요. 지방에서 정말 엄청나게 착취당하면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인 투쟁인데 돈이 워낙 없으니까 아무리 쥐어짜면서 아껴 먹어도 밥값을 못 견디니까 밥통에 요청을 하게 되어 시작한 일이지요.  우리도 그때는 몰랐어요. 하루 밥 세 끼를 한다는 게 어떤 규모의 일인지. 정말 하다하다 우리가 이러다 정말 밥해 먹이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웃음) 


현은희  정말 800명분 하루 세 끼를? 식당도 아닌 길거리에서요? 


김종민  너무 처절하게 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 알았죠. 이 일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구나. (웃음) 비까지 오는 날에는 어디 다리 있는 데에 가서 밥해 놓고 기다리다가 비를 뚫고 막 오는 동지들께 드리고 그랬어요. 길거리에 나와서 처절하게 싸운다는 건 그야말로 결사항전이지요. 길바닥에서 답 나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면서 가보자 이런 건데 문제는 거기서 바로 먹는 문제가 벽으로 딱 나타났지요. 


한광주  밥연대가 무엇보다도 필요했던 시기에 시작을 한 거네요. 


김종민  이 상황을 뚫고 가려면 연대가 절실한 상황인 거지요. 그래서 그때 각 대학에 민동, 동호회 동원해서 결합시키고 하는 일이 시작되었어요. 당시 개별적으로 집에서 음식을 해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진보신당에서 일시적으로 밥차가 움직이기도 했어요. 페이스북에 밥연대를 위한 모금 안내를 포스팅하는 사람들도 있었구요. 밥차에 다른 조직들이 결합하면서 밥통 활동이 본격화되자마자 그렇게 이제 막 처절하던 투쟁이 처절 플러스 대규모로 바뀐 거예요. 삼성전자에 이어 티브로드로 이어지는 노숙 투쟁으로 정말 광화문 종로 거리는 인도가 절반은 비어 있고 절반은 다 농성자들이 누워서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한광주  맞아요. 길에서 호수로 물 끌어다가 설거지하고 막 그랬잖아요.


김종민  그때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옷소매를 걷어부치며 참여해 주셨고, 그 과정에서 우리도 다양한 분들을 또 만나게 되었어요. 


현은희  사람도 힘들지만 일단 재정도 그렇잖아요. 


민동에 가서 SOS를 쳤죠. 그때 선배가 와서 ‘내가 정말 밖에서 그걸 하는 걸 보면서 심장에서 피가 나는데 할 게 없어가지고 끙끙 앓다시피 했는데 네가 이거 해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개인적인 후원을 해주시기도 했어요.



김종민  네. 기본적으로 이제 처음에 후원해 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 때 페이스북이나 이런 거 가지고 후원을 요청했고, 그 다음에 각자 이제 알음알음으로 후원금을 모아야 했어요. 저 같은 경우는 민동에 가서 SOS를 쳤죠. 그때 기억나는 게 삼성 집회에 선배가 와서 ‘내가 정말 밖에서 그걸 하는 걸 보면서 심장에서 피가 나는데 할 게 없어가지고 끙끙 앓다시피 했는데 네가 이거 해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개인적인 후원을 해주시기도 했어요. 이후에는 민동 자체에서 후원을 조직해서 우리 출동할 때 같이 와서 지원을 해주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 당시에 고대 동문회가 거의 1~2년 동안 굉장히 많이 결합을 해서 재정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밥알단도 많이 왔어요. 


신태섭  저도 듣기로 고대 민동에서 참여할 때도 이미 밥통은 정상적으로 버거웠던 거지요. 연대 사안이 너무 커서.


밥통 후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고대 민동 후원주점 포스터


한광주  진짜 고마운 점은, 우리가 한달에 한 번 웹진 드리는 것 이외에 특별히 회원관리라고 할만한 것들을 하고 있지 않은데 밥통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많다는 점, 굉장히 놀라운 일이에요. 보통 후원하는 분들의 기간이 5년을 넘기기 어려운 경우가 많잖아요. 

 

신태섭  그래서 웹진 같은 게 되게 중요하죠. 왜냐하면 이건 일종의 우리가 애프터 서비스잖아요. 쉽게 얘기하면 우리 이런 걸 하고 있다라는 걸 보여드리는 건데, 후원하시는 분들이 더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온 경우가 많은 거지요. 



귀하고 귀한 돈, 후원금


한광주  우리 밥통은 이사회와 집행위원회, 웹진 팀 이렇게 세 조직으로 활동히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물론 조합원 총회를 일 년에 한번씩 하고 있고요. 이제 각 조직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볼까 해요. 


김수영  이사회는 이제 보통의 운영을 담당하는 업무를 하고 있는 거죠. 재정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일을 하는 거죠. 


한광주  지금 김수영님이 3기 이사장을 맡고 계신 거지요?


김수영  예, 초대 하상수 이사장에 이어 한광주님이 2대 이사장을 맞았고 제가 3기로 이어가고 있지요.

 

한광주  그러니까 이사회는 밥통이 잘 돌아가게끔 재정 관리를 하는데요, 그 중에서도 우리가 회계를 굉장히 엄격하면서도 정확하게 하고 있다고 봐요. 회계를 맡고 있는 김종민 님, 일설에 의하면 출근해서 밥통 업무를 일부 보고 회사 업무를 본다는 소문도 있던데요.(웃음)


김종민  제가 회계 일정을 까먹을 수 있기 때문에 구글 일정표가 없으면 큰일 나거든요. 밥통 일정을 항상 다 거기다가 기록하고, 알림이 뜨도록 걸어 놓았어요. 예를 들어 원천세를 내야하는 일을 놓치면 안되니까, 출근 지하철 탈 때 알람이 뜨도록 해 놓고 회사에 가면 일단 그거부터 해야 차질이 없어요. 


김수영  밥통 회계에 관한 일은 어떤 한 사람이 결정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지요. 그래서 회계를 집행할 때면 이사회에 지출결의서를 올려 동의를 받는데, 이사장인 제가 바빠서 못 보기라도 하면 문자에 카톡에 마구 날아오지요.


김종민  우리가 관리하는 돈은 후원자분들이 마음을 담아서 보내주시는 거잖아요. 


한광주  그렇지요. 귀한 돈이죠.


김종민  그래서 더욱이 누가 임의로 마음대로 이렇게 막 쓸 수 있는 돈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돈을 어떤 식으로 집행을 하겠다는 기획을 하는 사람이 있고, 거기에 따라 현재 재정 상태에서 어떻게 집행을 해야 되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 그 내용에 문제가 없고 제대로 된 건지 확인하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이사들이 다 어떻게 돈이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기록으로 남기는 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모든 자금 집행은 지출결의서 없이 집행되는 거는 한 건도 없게 만들어 놓은 거고, 텔레그램에다가 그거를 바로 올리는 이유는, 제가 나중에 회계 정리해서 자료 제출할 때도 날짜를 기억하기 위해서에요. 통장 일정과 텔레그램 자료, 드롭박스에 있는 파일, 이 세 개만 있으면 단 한 건의 예외도 없이, 단 1원의 차이도 없이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거는 저만 보는 게 아니라 같이 이사회 안에 계신 분들이 다 같이 검증하고 확인한 자료이다보니, 단 하나도 엔지가 날 수가 없는 거죠. 


한광주  우리가 귀한 돈인 후원금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 교차 확인하고 그래서 누구 한 사람의 임의의 결정으로 자금 집행이 되지 않는 구조를 굉장히 강조했었고 그게 지금까지 잘 유지되고 있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회계를 보는 김종민 님께 참 고마워요. 우리가 굉장히 투명한 회계를 하고 있다는 데 자부심이 있지요. 저는 되게 인상적이었던 게 뭐냐면, 한 번은 우리 김종민 님이 텔레그램에다 사과문을 올린 적이 있었어요. 제가 언제 뭘 내야 되는데 못 내서 추가수수료를 40원인가 붙었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저는 이게 굉장히 이거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자주 입에 올립니다. 


우리가 귀한 돈인 후원금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 누구 한 사람 임의의 결정으로 자금 집행이 되지 않도록 교차 확인하는  구조를 굉장히 강조했어요. 그게 지금까지 잘 유지되고 있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회계를 보는 김종민 님께 참 고마워요. 

-한광주 밥통 편집장

 

한광주  밥통에는 집행위원회라는 조직이 있잖아요. 이사회와 집행위원회가 이렇게 나눠서 진행하는 특이한 구조이긴 해요. 여기 모인 분들이 다 집행위원이기도 한데,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김수영  처음에 밥통 체계를 잡을 때, 이사진과 집행위를 분리하기로 했어요. 각자 역량만큼 돈도 내고 운영에 책임을 갖는 사람 중 몇 명이 이사직을 맡기는 했지만, 그런 활동가 중에는 막상 출동의 의무감까지 갖기에는 어려운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집행위를 따로 만들기로 한 거지요. 연대를 원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 들어와서 할 수 있도록, 집행위가 실질적으로 모든 일을 다 기획, 준비, 실행하고 이사회는 전체적으로 협동조합이 잘 운영되도록 재정을 책임지는 식으로 해서 이론적으로 분리를 한 체계를 만들었던 거예요. 



일하는 사람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조직으로

 

정상천  초창기 문제의식 중의 하나가, 협동조합이니까 이사회가 있어야 되고 이사회가 모든 걸 결정하는 구조로 돼 있어요. 이게 뭔가 동질적이지 못한 측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무슨 느낌이 들었냐면 ‘이사회에서 다 결정하고 우리는 일만 하는 거야?’ 하는. 근데 나는 이게 불합리하다, 일하는 사람이 결정해야 된다, 그래서 이걸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일하는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해주십사 요청을 드렸고, 그걸 함께 의결해서 지금의 집행위원회 체계가 만들어진 거지요.


신태섭  우리가 이사로서 권력을 휘두른다고 생각하면 한 번도 없는데 단 한 번도 없는데?(웃음)


정상천  그 권력이란 게 뭐였냐면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뭔가를 결정하려면 승인을 받아야 된다. 물론 이사들이 ‘그건 안 돼!’ 이러지는 않지만, 여기서 막 논의를 하고 결국은 이사회에 가서 보고를 하거나 승인을 받아야 되는 이 구조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요.

  

신태섭  그거는 좀 그렇네요.

 

김수영  그래서 집행위원회가 판단하고 결정한다, 이게 우리의 첫번째 룰이였어요. 이사장도 거기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못한다. 그래서 출동에 관한 것은 집행위원장이 집행위원회에서 결정하기로 한 거지요. 


한광주  근데 이제 우리가 협동조합이라는 법인체이다 보니까 규정상 이사회가 결정해야 하는 것들이 또 있잖아요.


김종민  그렇지요. 승인이라는 표현보다 이사회 결의가 있어야 되는 게, 주소지 이전만 하더라도 이사회 결의서가 없으면 등기를 못 해요.



인생의 한 획이 되었던 밥알단 활동


한광주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집행위원회 얘기를 하려면 밥알단 얘기를 또 안 할 수 없어요. 밥통에 손을 보태는 모든 분들을 우리가 ‘밥알단’이라 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꼭 참석해주십사 요청을 드렸고, 그래서 일도 미루고 여기 와주신 현은희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현은희  오늘 일당이 안 나왔어요.(웃음)


제가 밥통의 일원으로 밥알단 활동을 한 것은 제 인생의 한 획이에요. 밥알단 활동은 정말 저한테 너무 귀중한 경험이고 너무 행복한 일이었어요. - 현은희 집행위원


현은희  제 페이스북 친구들이 다 노동당원들이 많은데 제가 밥통 활동 하는 걸 알고나서는 되게 수고한다, 오늘은 어디 갔냐고 물어도 보고 그래요. 그래서 한 번은 후원서를 내미니까 오히려 되게 고마워하더라고요. 대신 해 주니까 너무 고맙다고, 자기도 기여하는 바가 있게 되었다고요.  

제가 밥통의 일원으로 밥알단 활동을 한 것은 제 인생의 한 획이에요. 정말 되게 소중하고 이 경험이 너무 중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제가 몰랐던 투쟁하는 사업장, 사람들 그리고 해고당해서 너무 처절하게 싸우는 분들 보면 제가 살지 않던 세상이었어요. 내가 하기를 되게 잘했다. 대단히 큰 힘은 아니겠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 되게 뿌듯한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행복했던 일이 참 많겠지만 밥알단으로 활동했던 게 정말 저한테 너무 귀중한 경험이고 너무 행복한 일이었어요.


한광주  많이 고맙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밥알단이 있다는 게 감동입니다. 또 이 자리에는 없지만 이런 비슷한 마음으로 밥통 활동을 함께해 주신 여러 동지들을 기억하고 있고요. 이전에 매니저라는 직함으로 활동해주신 지연호님, 손지후님도 있었고요, 이런 기억들이 서로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여요. 


지금 이 자리에는 없지만 이런 비슷한 마음으로 밥통 활동을 함께해 주신 여러 동지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고요. 이런 기억들이 서로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여요.  -한광주 밥통 편집장 


한광주  집행위원회는 지금 4기가 활동하고 있는 거지요? 


김수영  예, 제가 처음으로 집행위원장을 했고, 그 다음에 지병건님, 김종민님, 한광주님으로 이어오다가 현재 정상천님이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지요. 


한광주  기의 구분에 따라서 뭔가 좀 변화나 이런 것들이 좀 있었을까요?


정상천  초창기에는 집행위원회 회의를 일주일에 한 번씩 했어요. 매주 월요일에 그 주에 출동을 확인하고, 바꿀 건 없는지 뭘 할 건지 논의했어요. 당시에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과했어요.


김수영  회의만 하는 게 아니고 일주일 내내 사람들 만나 조직하고, 출동하고, 밥알단 중 힘들어하는 동지가 있으면 만나기도 하고, 거의 그렇게 한 2년 동안 해 온 사람이 정상천 동지에요. 


정상천  변화라고 느낄 수 있는 건, 각 기마다 밥알단의 규모와 활동 역량이에요. 이사들은 거의 변동 없이 오는데 밥알단의 규모와 참여 정도는 급격하게 늘었다 급격하게 주는 거지요. 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는 동안 좋은 이야기도 많지만 중간중간에 아픔도 좀 있었어요.


한광주  그렇지요. 한 고비 혹은 두 고비를 지나온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래도 고비고비마다 새로이 또는 지속적으로 마음을 내어주는 분들이 있어 밥통은 꾸준히 출동할 수 있었던 거고요. 


또하나의 밥차, 웹진 《밥통》  

한광주  이제 웹진 팀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제가 지금 웹진 편집장을 맡고 있고, 류승아님, 계동님, 박민선님, 정상천님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웹진 제작에 있어 저로서는 아쉬움이 좀 있고 욕심도 더 나기도 하고요. 현재 여건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우리 편집진들하고 그럭저럭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웹진 초창기 때는 ‘지금’이라는 이름으로 발행을 했는데요, 당시 편집을 맡아주신 정상천 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2021년 웹진 편집위원 MT.
(왼쪽부터) 류승아, 이림, 계동, 한광주. 

이후 박민선과 정상천 편집위원이 합류하여 총 여섯 6명이  활동중.


정상천 밥통이 협동조합이니까 후원이라는 개념이 없고 뭔가를 만들어 팔아야 돼요. 그래서 구독료를 받는 개념으로 웹진을 만들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이렇게까지 고급 인력이 없었던 데다가 돈도 거의 쓸 수 있지 않아서, 출동 소식과 함께 숨은그림찾기도 하고 낱말퍼즐도 실으면서 여러 형태로 소식지 비스무리하게, 지금 웹진하고는 완전히 차이가 좀 컸죠. 초창기 웹진 편집 멤버가 세 명이었어요. 류승아 지금 집행위원하고 저, 그리고 디자인 해 주시던 분.


밥통 활동과 투쟁 현장의 소식을 담은 웹진 《밥통》을 지난 달에 100호를 맞았다.


한광주  당시 웹진은 ‘지금’이라는 제호로 발행했지요. jpg 파일 형식으로 카페24라는 플랫폼에 담았었구요. 이전 웹진이 재미도 있고 잘 진행되었는데 문제점이 하나 있었지요. 이게 그림파일이다 보니 텍스트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좀 다른 게 좀 필요하다는 고민을 하다가 밥통 웹페이지를 만들고 텍스트 형식의 웹진을 만든 거지요. 저도 웹진을 만든 경험은 없어서 김수영님하고 캠페이너스 누구나 데이터 사무실에 가서 교육을 받았어요. 위젯 만들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김수영  배우긴 했는데 막상 하려니까 어렵더라구요. 

 

이림   저 역시 얇고 넓은 지식으로.(웃음)

 

한광주  컨텐츠에 조금씩 변화를 줘가면서 지금의 웹진의 모습으로 나가게 됐는데 그동안에 디자인을 맡아온 이림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할게요. 


이림  53호부터 밥통 웹페이지에 웹진을 실었어요. 게시판을 웹진처럼 구성해서 하고 있는 거라 그냥 가능한 선에서 하고 있고요. 그 이전 과월호도 같이 볼 수 있게 다 업로드를 다 해두었어요. 조금 조금씩 하다가 이번에 완료를 해서 뿌듯해요. 우리 웹에서 과월호보기에서 ‘지금’을 다 볼 수 있어요. 


한광주  하면서 어떤 고민이나 이런 거 좀 있으셨어요?


이림  처음에 만들 때는 게시판에서 웹진으로 보이게 하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을 좀 했었고, 게시글 형태로 올리니까 이제 텍스트 자료로 나중에 다시 활용하는 부분도 해결이 돼서 자료 기록용으로도 훨씬 더 좋아진 것 같아요. 검색해 보니까 이제 구글 같은 데도 ‘밥통’이라고 나와서 그런 것도 좀 좋아진 것 같고, 좀 더 검색 잘 되게 해시태그랑 이런 거 조금씩 더 붙여서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53호부터 밥통 웹페이지에 웹진을 실었어요. 그 이전 과월호도 같이 볼 수 있게 다 업로드를 다 해두었고요. 밥통 웹에서 과월호 보기 밑에 보시면 옛날 웹진 ‘지금’을 찾아볼 수 있어요.

-이림 웹진 디자이너


현은희  후원자와 웹진의 매칭이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제 지인 중 후원하시는 분이 그러는 거에요. 자기가 한 달에 3만 원씩 꼬박꼬박 내는데 이렇게 웹진이 오면 돈을 내는 데에 대한 그 대우를 받는 것 같아 좋다고요. 그래서 잘 읽어보냐고 물었더니 시간 날 때마다 다 읽어본다면서 내용도 좋다는 거에요. 


한광주  웹진의 내용적인 고민도 되게 많아요. 욕심은 되게 많이 나지만 이것을 전업으로 하는 게 아니다 보니 활동에 좀 한계도 있고, 또 이렇게 막 해도 괜찮은지 아쉬움이 크기도 하고요. 지금 밥통의 게시물 중에 가장 높은 조회수를 보이는 게 몇 개라고 생각하세요? (400에서 600개라는 대답) 지금 제일 많은 조회수를 보이는 게시물은 3천이 넘어요. 2천 올라간 거 꽤 되고요. 


김수영  철대위 김이옥 님 기사가 나간 후로, 그 글을 프린트해서 갖다 드렸거든요. 그분들의 투쟁을 설명하는 용도로 필요하다 하시더라구요. 오시는 분들한테 다 일일이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그걸 딱 나눠주시면 되니까 훌륭한 보도자료가 되기도 했지요. 


한광주  사실 ‘여기 사람이 있다’ 코너가 여러 용도로 필요하다는 건 아는데, 최근 들어서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가 잘 쓰지 못하고 있어요. 외부 필진에게 청탁을 해서라도 계속 실어겠다는 생각도 해요.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웹진 제작을 하는 과정에서 아직까지 고료를 못 드리고 있어요. 필자 분들께는 참 미안하고 민망한 일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상품권이라도 좀 드려야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숙제로 남는 것 같아요. 우리 편집위원으로서 정상천님은 보시기에 어떠세요?


정상천  시각적인 퀄리티의 변화가 크지요. 저는 처음에 웹진 형식을 바꿔보자 했을 때, 거기에 쓸 에너지를 본업에 써야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결과물로 봤을 때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누군가가 시간을 들여 고민하고 그게 결과물로 나왔을 때의 느낌은 참 좋았어요. 


한광주  우리가 웹 페이지도 좀 더 활용할 필요가 있어요. 밥통에 홈페이지로 역할도 같이 했으면 좋겠거든요. 홈페이지인데 웹진 게시용으로만 우리가 사용하고 있으니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우리가 이 부분을 함께 고민해 봐야겠어요. 


신태섭  제가 보기에 우리 웹진의 내용이나 글의 수준이 되게 높은데, 이렇게만 쓰기에는 좀 아까운 것 같다는 생각은 꽤 들지 않아요? 그러니까 작은 책 같은 식으로 출판을 하면 되게 의미 있을 것 같은데, 하여튼 내용은 워낙 좋은데 보는 사람은 한정적인 것 같아서 더 많이 보게끔 하는 거에 지금 신경을 좀 써야 할 것 같은데…. 


웹진의 내용이나 글을 이렇게만 쓰기에는 좀 아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은 책 같은 식으로 출판을 하면 되게 의미 있을 것 같은데….


박민선  제가 볼 때는 조회수가 좀 오르락내리락 하며 편차가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거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이림  그 글을 쓰신 분이나 인터뷰이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정상천  혹시 웹진의 내용 중에 괜찮은 거를 브런치나 이런 데 계속 올릴 수 있지 않나요. 밥통에서 브런치를 운영을 하면서 좋은 글들을 올리는 것도 좋겠어요. 


박경열  브런치라는 게 대중성이 있어요. 많이 봐요. 포털에도 뜨고요.


김수영  저 역시 우리가 그동안에 해왔었던 것 중에서 괜찮은 글을 뽑아서 책자로 만들고 싶었었던 생각이 있어요.  


한광주  아까 신태섭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좀 더 활용도를 높여보자라는 면에서는 한 번 우리 같이 논의를 해볼 만한 일이네요. 


김수영  동영상을 편집해서 싣는 일도 웹진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이지요. 박경열 동지 아드님인 박정수님이 이 영상 제작에 전문성이 있어서 밥통 영상을 제작해 주기도 했어요. 손이 빠르니까 우리가 며칠 걸릴 거를 바로 정리해 주거든요. 웹진 리뉴얼 초창기 때 한광주 동지하고 기아 사무실로 가서 박정수님한테 동영상 편집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어요. 그런 분들의 지원을 받아 영상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에요. 


한광주  출동 영상이 만들어지면 우리 유튜브인 밥통tv에 올려 웹진에도 그 링크를 싣기도 하지요. 우리가 이런 작업들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서서히 혹은 격하게 변화해 온 밥통의 흐름

 

한광주 우리가 밥통 시작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흐름을 가지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요, 밥통에 어떤 변화의 시점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중에 하나가 부엌을 마련한 일이지 싶은데요. 그 때 우리가 모처럼 ‘밥숟가락’이라는 이름으로 공개적인 모금을 했었지요. 고맙게도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고 그 덕분에 부엌도 마련할 수 있었지요. 그전까지 밥통에 부엌이 없었어요. 그래서 주소지 안산 거기에 지하에 1평짜리 창고에 물건을 두고, 과천 무지개 학교 부엌을 빌려 쓰기도 했지요. 없는 돈에 부엌을 구하려고 하니 부동산하는 제 친구와 함께 인덕원에서 평촌까지 뒤져 나갔는데 한 달에 20~30만 원으로 빌릴 데가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가 지금 부엌을 만났지요.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상가였어요.


신태섭  맞아요. 그 때 상가 생태는 그랬지만 위치는 엄청 좋아요. 주차장도 있고.


 

2019년 밥통부엌을 마련하기 위한 ‘밥숟가락’이라는 이름으로 모금을 했고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셔서 밥통에 안정된 공간이 생겼다.


한광주  그쵸. 우리는 밥차가 있으니 주차 공간이 꼭 필요하잖아요. 엉망인 공간을 여러 사람들의 지원으로 다듬어 나갔어요. 그때 안광일님이 오셔서 큰 힘을 주셨지요. 



지역 밥통이라는 꿈, 경남밥통


한광주  최근 큰 변화라면 경남밥통이 만들어진 일인데요. 지난 달에 첫 출동을 했고 이번 달에는 소성리 출동도 같이 출동도 했어요.  

김종민  그 장면을 딱 보는데 되게 감동적이었어요. 더구나 그 소식이 실린 웹진 100호에 실리니 감동이 더 강했어요. 우리가 뭔가 해내고 있는 느낌.


신태섭  동학혁명군 남접과 북접이 만나는 거의 그런 느낌이었어요. 


김수영  밥통 초창기에 우리가 시청에서 집회하다가 김종민 동지가 어떤 화면을 보고 그런 말을 했어요. 전국에 밥통 다섯 개 만들어지고 전국 집회할 때마다 다섯 대 다 모아서 쫙 옆에다 세워놓고 그걸로 엘이디 켜고 그러면 참 좋겠다고. 그러다가 이후에 진짜 경상도에도 하나 전라도에도 하나 충청도에도 하나 서울에도 하나 이렇게 해서 밥통을 전국적으로 이렇게 한번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한 지 8년 만에 창원에 경남밥통이 만들어진 거지요.


밥통 창립 당시 많은 분들의 마음을 모아 마련한 밥차가 창원으로 내려가 경남밥통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한광주  오래 전부터 꾸어왔던 꿈이기도 했지만, 경남 창원에 노란 밥차를 내려보내는 낼 수 있었던 것은, 밥통에서 전기차를 새로 구입했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기존의 디젤차가 우리에게는 밥통 시작부터 함께했던 굉장히 의미 있는 차였기 때문에, 그냥 중고차로 내놓을 수는 없었지요. 좀 의미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강했던 거지요. 또한 이렇게 전기차를 마련할 수 있었던 데는 이 일을 추진한 박경렬님의 역할이 컸지요. 그 이야기를 좀 이렇게 해주시지요?


박경렬  2021년에 우리가 그 차를 받았지요? 실제로 탑 올라간 것까지 한 3천 들어갔구요.


김수영  그렇지요. 차를 새로 살 때를 대비해서 묶어놓은 돈이 천여만 원 있었고, 신태섭, 박경렬 두 이사님이 기아자동차 노조에서 천만 원을 받아오시고, 또 여기 있는 한광주 김종민 두 분이 1천만 원을 내서 새 밥차를 마련할 수 있었어요. 


새 전기차는 아마도 향후 10년을 쓰는 데는 전혀 무방하지 않겠나 싶어요. 앞으로는 이제 배터리 성능도 더 나은 게 나오면 바꿔 준다고 하니. 계속 개발이 돼서 한번 충전으로 300 내지 400킬로는 갈 수 있게끔 계속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어요. 

-박경열


한광주  박경열님이 그 업계에 있으니 발 알고 선점할 수 있었던 거지요. 


박경렬  아마도 향후 10년을 쓰는 데는 전혀 무방하지 않겠나 싶어요. 앞으로는 이제 배터리 성능도 더 나은 게 나오면 바꿔 준다고 하니. 계속 개발이 돼서 한번 충전으로 300 내지 400킬로는 갈 수 있게끔 계속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어요. 


한광주  처음. 우리가 이제 차 얘기만 얘기를 나왔을 때 그때만 해도 굉장히 먼 얘기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신청을 할까요. 말까요. 이렇게 물어보셨을 때 그냥 우리가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결정했다기보다는 '당연히 해야지...' 이런 식으로 결의했는데 그게 신청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있는 일도 아니었어요. 그렇죠?


박경렬  우리 밥통 주소지가 안산인데 경기도에 그 당시에 80대가 배분이 됐어요. 어떻게 잘 해보려 한 게 정말 잘 된 거지요. 지금은 신청을 해도 받지 못해요.


한광주  그 때 타이밍을 놓쳤으면 되게 어려웠을 터인데 잘 맞춰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아요. 



연대가 낳은 연대, 이소선합창단과의 공동출동 


김종민  최근 우리에게 하나의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소선 합창단에서 밥통과 함께하기로 한 일이에요.  


한광주  맞아요. 참 반가운 소식이자 밥통이 하는 연대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일이지요. 

 

김종민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공동출동을 하자고 결의했고, 세종호텔 앞에서 세 번째 공연과 출동을 함께 했어요, 일단 세종호텔 앞에서 공연을 준비하면서 자꾸 연습도 하게 되고, 이소선 합창단과 밥통 모두에게 좋은 에너지가 생겼어요. 


한광주  출동과 합창 공연을 함께 하면 출동 현장이 훨씬 풍성해 지지요. 


김종민  그렇지요. 합창단원들이 일찍 오셔서 같이 배식 준비하니까요. 단원 중 한 선배님께서 제게 후원신청서를 달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드디어 이제 노령연금이 나와서 정기 후원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씀하시는데, 진짜 이거는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벅찬 일이었어요. 


이소선합창단과 밥통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공동출동을 하자고 결의했고, 세종호텔 농성장에서 세 번째 공연을 마쳤다.


한광주  노령연금을 받으시면서 이제 밥통을 후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하셨다는 게 참 감동인 말씀이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김종민  세종호텔 출동뿐 아니고 지금 강남역 집회 출동도 예정되어 있는데, 삼성본관 앞에서 정말 난장을 해보면 신나겠구나 이런 생각도 들어요. 노래도 있고 밥이 있고, 거기에 합창단원이 집회 참가자가 되기도 하고요. 이제 앞으로 우리 밥통이, 그냥 꿋꿋이 걸어가는 개념보다는 서로 힘을 내면서 이 길을 싸워나가는 사람들이 서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거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변화하는 투쟁 환경과 밥통


한광주  박민선 님이 밥통 상근자로 활동하신 지도 2년차인데요, 민선 님이 삶에서 어떤 변화가 있으신가요? 


박민선  상근자로 일하는 것이 어떤 무한 책임감을 갖게 되는 게 있어요. 이게 좀 힘들기는 해요. 제가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일도 무한 책임을 가져야 되는 일이다 보니까 더욱 그러해요. 지금 고정적으로 출동하는 곳이 있고 또 어떤 현장을 그때그때 가고 있는데요, 출동 현장을 정해서 가는 일이 아직은 고민이 돼요. 제가 투쟁 현장에서 활동했던 사람이 아니다보니 그게 저한테는 좀 어려운 부분이네요. 그런 가운데서 정상천 집행위원장님이 정말 많이 도움을 주셨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부분에 제 마음의 짐을 많이 해소해 주셨죠. 


한광주  우리가 이제 출동을 어디를 할지를 정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지요. 여기는 꼭 가야 하는 곳, 여기는 우리가 갈 곳이 아닌 곳 이런 것들이 되게 엄격하게 논의가 되던 시절이 있었고요. 근데 어떻게 보면 이제 운동판도 변하다 보니까 우리의 생각들도 조금 다르게 판단해야 되는 부분들이 있을 것 같아요. 


김수영  현장 활동하는 동지들이 지역과 소통하면서 함께 해나가면 좋겠어요.


신태섭  그런 점에서 저도 좀 더 적극성을 띠고 할 필요가 있겠네요. 이제 정권도 바뀌고 이 정국에서 노동과 사회의 지형을 변경하려고 하고, 또 묵은 체증이 있는데 이거를 또 노동자들 측에서는 노동자로서는 이 문제를 돌파해야 되기 때문에 화물연대라든가 대우조선이라든가 비정규직단이라든가 이렇게 이슈화되고 계급 투쟁이라고 표현되는 그런 것들이 드러날 때 밥통도 이들과 함께 하는 게 중요해 보여요. 


김종민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은 네트워크에서 저희가 꼭 필요한 곳이 있는 거는 연결을 해주시면 이제 집행위원장님하고 같이 의논해서 결정하면 될 것 같아요.  


밥통이 연대한 투쟁장에서  전해온 승리의 소식은 출동에 힘을 더한다.

상) 2021  LG타워 분회 | 하) 2016 하이디스 지회



나에게 밥통은 00이다?


한광주  마지막으로 내게 밥통은 무엇일까? ‘내게 밥통은 00이다’에 00을 채워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나, 정상천에게 밥통은 세상배움이다!


나, 김수영에게 밥통은 따뜻함이다.  


나, 현은희에게 밥통은 행운이다.


나, 이림에게 밥통은 맞잡은 손이다. 


나, 박민선에게 밥통은 끌어주는 말(馬)이다.


나, 신태섭에게 밥통은 어울림이다.


나, 박경열에게 밥통은 사랑이다.


나, 한광주에게 밥통은 늪이다.(한번 빠지면 발을 빼기가 어려워) 


나, 류승아에게 밥통은 깜빡이다.(방향을 알려주니까)


나, 계동에게 밥통은 기러기아빠다.(멀리 떨어져 못 만나고 있다)


나, 홍정미에게 밥통은 기도이다.


나, 김종민에게 밥통은 바늘이다.(나는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