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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 | 59호여기 사람이 있다 | 충주 농꾼의 밥통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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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이 있다]

충주 농꾼의 밥통연대기

김홍현(농꾼노동자)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들에 산에 마주하던 제비꽃, 진달래가 이제 짙은 이파리만으로 뜨거운 여름을 맞이하고 있나 봅니다. 지난 겨우내 황량함만을 주던 텅빈 논과 밭에는 어느 새 벼가 심기고, 고추가 심기고 머잖아 참깨와 들깨가 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되어 참 어색하기만 합니다. 안녕하세요. 전 충주에서 이 여름을 땀으로 맞고 있는 ‘농꾼노동자’입니다. 가끔 번잡한 도시의 저녁, 가로등 아래 포장마차에서 소줏잔 기울이던 시간들이 그립기도 하지만, 농삿꾼의 삶을 그런 대로 잘 살아내고 있습니다. 


몇 해 전 김장을 하며 조금 더 손을 더해 만든 김치를 <밥통>에 보내며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잘것없는 김치 한 꾸러미를 보내며 무안하기도 했지만, 저 같은 작은 연대의 힘이 모여 조금씩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믿고 있기에 보잘것없는 민망함을 감출 수 있었습니다. 씨앗 준비부터 시작해 보살펴 키우고 맞이한 수확물로 만들어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 안에 정성을 곁들일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현장의 뙤약볕 아래 힘을 다하시는 분들께 미안함을 덜 수 있는 길이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네 가지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이름을 짓는 일이고, 이어 옷을 짓는 일, 밥을 짓는  일, 집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짓는다는 일, 그것은 한 사람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감에 반드시 필요한 그 네 가지를 지어냄으로써 삶의 목적을 다하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어느 것 하나 빠질 수 없는 일이었기에 옷과 밥과 집, 그리고 이름을 짓는 일은 노력과 정성을 다해야 하는 그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네 가지 중 하나를 해내는 <밥통>이라는 연대의 힘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밥을 짓는 일에 늘 최고의 노력과 정성을 다하시는 분들의 모습은 늘 제게도 또다른 힘이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주변에는 천박한 자본의 힘이 너무나도 난폭한 힘을 부리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평택에서, 부산에서, 제주에서 전국 어디를 가리지 않고 그 천박한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많은 이들은 침묵하고 있고, 외면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 나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는 위안을 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자본의 힘에 꽉 막힌 채 숨을 헐떡이고 있음에도,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와 활동가들이 그 광폭한 힘에 맞서 힘겹게 버티어내고 있음에도 이 사회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힘겹기만 합니다.

 

연대의 힘. 우리에게 <밥통>이 있고, 이로 인해 또 다른 활동가들은 더욱 큰 힘을 얻을 것입니다. 현장의 거리 위에 힘겹게 서있는 분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이 되기도 하고, 저같이 함께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미안함을 느낄 수 있게도 하는 스승 같기도 하고, 동시에 그 미안함을 덜 수 있는 행복한 ‘나눔냉장고’ 같기도 합니다. 밥통의 밥알단들이 지어내는 밥 한 그릇, 반찬 한 접시에 다시 그 길 위에 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행복함일 것이라 믿습니다. 작은 힘들이 연대라는 이름으로 모여 만들어내는 믿음에 또다시 사회는 한 발 앞으로, 그리고 다시 두 발 앞으로…  어느새 몇 걸음씩 뛰어가는 변화를 맞이할

초석이 될 것이라 역시 믿습니다. 


다시 산으로 오를 시간이 되었습니다. 횡설수설한 글이 부끄러워 이만 마쳐야할 것 같습니다. 다시 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농꾼의 시간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저의 손길을 기다리는 어여쁜 체리나무들도 머지않아 수확의 기쁨을 안겨줄 블루베리 나무들도, 이 뜨거운 여름을 맞짱 뜰 기세로 커가는 고추들도 농꾼에게 힘이 되는 존재들입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서도 부끄럼을 느낄 수가 없는 자식같은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그리고 내일도 그들에게 모든 힘을 쏟아 건강한 먹을거리를 만들어내는 농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늘 한귀퉁이에서 미안함만 안고 있는 저에게 그나마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게 해주신 <밥통>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하게 지은 <밥심>으로 오늘도 내일도 힘겨운 투쟁의 길에 계실 분들께 더욱 큰 힘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모든 분들의 건강과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노동의 힘을 믿는 모든 분들께 행복 또한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2019년 어느 뜨거운 여름 그 안에서.  충주 농꾼노동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