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2024.03 | 밥통 115호

19.10 | 63호여기 사람이 있다 | 강남역 철탑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이종란

조회수 2105

[ 여기 사람이 있다 ]


강남역 철탑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 삼성 무노조경영의 희생자, 김용희와 이재용 해고노동자에게 연대를!  

이종란(반올림 상임활동가)


 


9월의 마지막 일요일 밤, 밥통 매거진에 실을 글을 써 봅니다. 추석 연휴 말미에 삼성해고노동자 고공농성 철탑으로 오색전과 비빔밥을 한아름 준비해 오셨던 한광주 밥통 이사장님의 기고글 요청이 있었습니다. 글 재주가 없어 부끄럽다는 생각은 잊고, 나의 삼성해고노동자 연대기를 밥통 후원회원님들과 나눠봅니다.


오늘 낮에는 몇 달 만에 가까운 식물원을 찾았습니다. 파아란 가을 하늘 아래, 하얀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좋아하는 선호로 따지면 저는 식물을 좋아합니다. 오랜만에 아름다운 자연을 마주했는데, 카메라 셔터도 누르지 않는 나를 발견합니다. 이상하게 마음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를 스스로 모르지 않습니다. 


작년 가을, 서울 근교의 시골로 이사 와서는 10평 텃밭 분양을 받아 농사도 지어봤습니다. 봄 가뭄에 물도 열심히 주면서 상추도 키우고 호박, 고추, 가지, 아욱, 열무 등 여러 작물들을 재배했습니다. 도시 농부가 되기엔 부족한 게 많지만 햇볕을 받으며 초록이들을 돌보는 자체만으로도 절로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식탁도 건강해졌습니다. 그런데 6월 중순 지나 어느 날부턴가, 밤낮이 없어지고 갑자기 바빠졌습니다. 매일 가던 텃밭은 한 주 내내 방치되고 일요일에 잠깐 들러보기도 바쁘게 된 나를 발견합니다. 


강남역 사거리 25미터 교통관제탑(CCTV철탑) 위로, 60세의 김용희 삼성 해고노동자가, 일주일 동안 단식으로 속을 비운 뒤에 6월 10일 철탑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것도 열흘이 지난 뒤에야 저는 그 현장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 현실과 마주할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단식은 계속되었고, 고공농성은 위태로웠습니다. 사람이 매일같이 견디기엔 너무 협소했습니다. 직경 1미터의 좁은 철탑. 김용희님은 잠을 잘 때 몸을 새우처럼 말고 잔다고 했습니다. 다리를 뻗으면 발이 철탑 밖으로 삐져나왔습니다. 


철탑 아래 천막에는 김용희에게 물을 올려주고 안부를 살피며 함께 투쟁하는 동갑내기 이재용 삼성중공업 해고노동자가 있습니다. 반올림 농성 당시에도 해고 투쟁을 했던 그들입니다. 이들의 투쟁은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오래 전 일이라고, 안될 싸움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좁은 철탑 위, 고공 단식 농성이 사람의 극한을 넘어가는 것 같은 불안 속에 계속되면서 이 투쟁은 그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뭇사람들의 걱정이 앞섰던 겁니다. 시민사회대책위도 뒤늦게 결성이 되었습니다. 철탑 위로 의료진과 심리치료 선생님이 119소방 사다리차를 이용해 김용희님을 만나려 애썼습니다. 김용희님은 의료진을 거부했습니다. “아프다고 나를 내려보낼 생각은 추호도 하지마시길 바랍니다.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올라왔습니다. 삼성으로부터 사과와 복직 약속을 받기 전엔 죽어도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길래 자신을 가두고 밥을 굶고, 인간으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저곳에서  버티고 있는지... 나는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이해를 해보려 해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천막에서 김용희님의 낡은 가방을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그가 오래전부터 자신의 해고 문제로 싸워왔던 일들, 여러 전단지들, 그가 90년에 근로기준법 설명회를 열고 노동조합을 만들려 애썼던 흔적이 적힌 빛바랜 종이들, 믿기지 않는 탄압의 여러 증거와 정황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김용희님과 이재용님이 당한 무노조경영 인권탄압, 노조탄압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둘 다 90년대 삼성에서 노동조합을 하려다 죽도록 맞고(각목 등 흉기로 죽기 전까지 폭행을 당함), 납치를 당하고(노조 포기각서를 쓰라고 호텔방, 모텔방으로 여기저기 끌고 다니면서 협박함), 여성관련 문제로 조작해 해고를 당하고(성추행, 성폭력 등 사건을 회사에서 조작함. 여성을 희생시키는 잔인한 방식으로 삼성은 노조 주동자를 해고함), 간첩 누명을 씌우고(김용희는 러시아 삼성건설지부로 발령받은 뒤에, 삼성으로부터 러시아 당국에 간첩으로 신고당함, 이재용은 삼성의 신고로 안기부 대공분실에 11번을 끌려가 협박당함), 그러고도 버티면 해고를 했습니다. 


한편 90년대에 삼성노동자가 법으로 싸워 복직을 하는 것은 정경유착의 상징인 삼성재벌 통치하에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러시아에서 간신히 한국으로 돌아온 김용희는 해고통보서도 없이 길거리로 내몰렸고, 법은 그를 구제하기는커녕, 해고기간 임금상당액을 달라는 요구는 ‘공갈죄’로 내몰아 구속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재용 삼성중공업 해고노동자도 법의 구제를 받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이재용님은 2013년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이 싸워 만들어진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부당해고라는 결정을 받았고 위원회는 삼성에 복직을 권고했지만 삼성은 경영난을 이유로 거부하였습니다.   


김용희님은 노조탄압을 겪는 과정에서, 아버님이 유서를 쓰고 집을 나간 뒤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또한 92년 어느 날 삼성의 사주를 받은 경찰은 김용희님의 부인에게 성폭행을 시도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일은 부산일보 기사로도 실렸고 경찰은 구속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은 두 해고노동자는 60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시계는 해고를 당한 95년과 97년에 각각 멈춰 있습니다. 이들이 바라는 건 삼성의 사과와 복직입니다. 


그간 시민사회 대책위는 삼성은 물론이고, 국가인권위나 청와대, 정치권에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호소했습니다. 해고자들의 요구대로 사과와 명예복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떤 대책도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김용희님은 연대하는 동지들의 간곡한 호소로 7월 27일까지 55일간 진행했던 단식을 마무리했으나, 지금도 고공철탑 농성은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로 112일째입니다. 


 처음엔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시작한 연대이지만, 이 두 해고노동자의 투쟁은 어느새 나의 삶을 파고들고 가장 아픈 부분이 되었습니다. 


이 투쟁은 다시 한 번 삼성재벌의 본질을 고발하고, 이재용 구속의 필요성을 노동자의 관점에서 설득해내고, 무엇보다 반헌법적인 무노조경영 노조탄압의 문제가 법의 시효가 지났다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를 통해 다시금 살아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나는 그리고 함께 투쟁하는 우리는 꼭 승리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대들의 연대가 그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