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2024.03 | 밥통 115호

22.06 | 94호땅과 사람 | 시골살이 /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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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시골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다

시골살이를 시작하려고 본격적으로 마음먹고 나니 막막했다. 동서남북 당최 어디로 가야할지, 꼭 길 잃은 사람의 처지였다. 일단 휴대폰을 열고 시골에 살거나 시골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훑고 연락을 돌렸다. 그렇게 전국 팔도의 유람이 시작됐다.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들은 후딱후딱 이곳에서 저곳으로, 몇 년에 한 번씩 이주도 잘하는데 나는 삶터를 바꾸는 게 쉬운 사람이 아니다. 집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성격이다. 그런 내가 낯선 사람들까지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어떤 때는 하루 묵기까지 하면서 이주를 위한 탐색 여행을 다니게 된 거다. 


맘에 드는 지역에 가면 귀농귀촌센터에도 방문해 더러 상담을 받았다. 나와 눈도 마주치기 전에 실무자들이 상담일지를 내밀고 이름과 전화번호,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을 적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처음 묻는 질문이 ‘귀농인지, 귀촌인지’ 구분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꼭 둘 중에 무엇이어야 하냐’며 되물으면 그제야 눈을 마주치며 적잖이 당황해 한다. 

현재 여성 일인가구이며, 나만큼이나 시골살이가 꿈인 울엄마도 같이 이주할 계획이라고 말하면, 새로운 이웃이 될지 모를 나에 대한 무심한 태도는 한층 더 심해진다. 어떤 이들은 ‘도시에서 살다 온 노인은 시골에서 지내기 힘들다’고 노골적으로 조언(?)해 주기도 했다. 시골은 ‘청년! 청년!’ 노래를 부르고 여기에 더해 자녀가 있거나 자녀를 나을 계획의 젊은 부부라면 가장 환영받는 ‘케이스’가 된다. 노동력도 그닥 없어 보이며, 앞으로 인구를 더 늘릴 생산능력도 없는 여성 2인은 지자체 인구정책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영양가 없는 ‘케이스’인 거다. 

증식 가능성 여부에 따른 ‘인구’ 취급을 받는 게 썩 기분 좋지 않다. 여기에 더해 가지고 있는 재산까지 물어보면 참 갑갑해진다. 상담은 몇 번 다니다가 그만뒀다. 그들의 실적이고 싶지 않았다. 대단한 친화력이라도 발휘한다면 이런 상황이 어느 정도 극복 되겠지만, 그럴수록 나도 잘만하면 ‘괜찮은 인구’에 포함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내가 보였다. 내 자신이 안쓰러워 그것도 그만뒀다.  


도시에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소비자’인지에 따라 나의 정체성을 규정당한다. 그것이 지긋지긋했지만, 그래도 도시에서는 취향이나 기호라는 알량한 다양함이라도 있지 않았던가. 시골 진입 관문에서는 귀농인, 귀촌인, 원주민이라는 몇 개 되지도 않는 정체성 중 하나에 속해달라고 하니 당황스럽다. “내가 꼭 그중에 하나여야 합니까?”라고 제도에 물을 수도 없는 일이고. 어느 때는 알량한 이사지원금이니 하는 거라도 받을 요량이면 그 영역화된 정체성 안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나는 이 영역 요건에 맞는 사람이니 나를 이 영역으로 취급해 달라!’


무사히 시골에 안착

말로 다 할 수 없는 우여곡절은 중략하고, 이사 과정에서 뼈마디가 몇 개 있는지 셀 수 있었던 관절의 고통도 이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고. 지금은 시골 작은 마을에 일단 안착했다. 지난 2020년 늦봄 기적처럼 나와 인연이 된 빈집을 만났다. 아담한 집 뒤 텃밭에 깔린 보라색 헤어리비치꽃이 펼쳐진 풍경은 분명히 나더러 ‘널 기다렸다’고 말하고 있었으니 어찌 인연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250Km를 이주해 시작한 시골살이를 꼬박 2년 채워간다. 임대로 얻은 임시거주지이긴 하지만 그토록 꿈꾸던 시골로 왔다는 사실 하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위로가 되는 ‘내 스스로 만든 나의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귀농이냐, 귀촌이냐 물어보면 이젠 그냥 시골이 좋아 이사 왔다고 말한다. 대번에 이 말을 들은 사람들(특히 동네 할머니들)은 암꺼또(아무것도) 없는 시골이 뭐가 좋아 왔냐고 그런다. 짓궂은 사람들은 얼른 다시 돌아가라고도 농담한다. 그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백을 찾아왔으며 얼마나 힘들게 이주를 해왔는데 그런 말씀들을!


시골살이

동네 할머니들이 잘 안 다니는 시간을 골라 쇠스랑, 괭이, 발고무래를 챙겨 어슬렁어슬렁 텃밭으로 간다. 할머니들이 보면 구경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누가 밭을 허리로 가나? 경운기 빌려줘?”

“빌려주셔도 못 써요.”



기계도 비닐도 제초제도 안 쓰니 농사를 희한하게 짓는다며 별종 취급을 하면서도 할머니들은 내게 친절하다. 내 허리는 동네 할머니들의 사서하는 걱정거리 중에 하나가 되었으며, 밥 때만 되면 옆집 할머니네 놀러가 있는 엄마를 찾으러 다니며, 틈만 나면 우리집 화단에 제초제를 치시는 이장님한테 골을 내며 하루하루 시골에 스며드는 중이다. 동네에서 늦잠을 자는 것으로 유명한 나는 아침 일찍 돌아다니면 동네 어르신들이 놀랠까 봐 되도록 규칙적으로 늦잠을 자는 편이다. 엄마는 인근 할머니들 사이에서 막내로서 ‘한창 때’, ‘젊은 것’이라는 부러움을 사며 나보다 더 시골에 잘도 스며들고 있다. 

시샘 많은 윗집 어르신은 작년에 비닐을 치지 않는 우리 땅콩 농사를 보고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올해 당신 땅콩 밭에 비닐을 안 치셨다. 당신 밭 땅콩은 두더지가 다 먹어버렸는데 왜 이 집 땅콩은 안 먹었냐며 그게 혹시 비닐의 차이인지 실험 중이신 것 같다. 내가 배추밭에 막걸리액비를 뿌리고 있으면 귀신같이 나타나 그거 뭐 좋은 거냐며 약통에 남은 놈은 당신 밭에 마저 뿌리라고 하고는 고추장 한 통으로 딜을 하신다. 나는 이것이 할머니들이 ‘도시것’에게 말 거는 방식이라는 걸 잘 안다. 새로 이사 온 ‘도시것’이 다행히 잰 체하지 않고 좀 모지라 보였는지 별것도 아닌 고장 난 물건들을 가져와 고쳐보라고 하시거나 텔레비전이 안 나온다며 오라고 하고는 밥을 먹이시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말을 섞을수록 진하게 노출해야 하는 개인정보가 부담스러우면서도 그 댓가로 얻는 이 ‘생활 스토리’들을 나는 사랑하는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부녀회장님이 와서 내 나이를 물어보면 “안 가르쳐드릴 건데요. 회장님보다는 덜 먹었어요.”하는 능청도 생기면서 말이다. 

하루 기분 좋고, 이틀 우울하고, 한 삼일 아무 생각 없다가, 하루 술 한 잔 하면 그럭저럭 일주일이 흘러가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숲속의 나무 한 그루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그저 한 사람이 되는 것이 장래희망이다. 막연하게 시골에서는 그게 가능할 것이라 낙관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누군가의 취급으로 장래희망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람들은 자기가 규정한 영역 안으로 구분되지 않는 존재를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 역시 사람들을 만나 나이, 성별, 결혼여부, 직업 등등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인식하는 오랜 습관을 ‘관심’이라고 포장해왔고. 그저 순수한 존재로 취급받고 싶은 욕구는 스스로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에서부터 채워야겠지? 또 내가 남을 그렇게 보는 노력과 반성은 양심상 뒤따라 와야겠지. 


아무튼 시골살이의 긍정적인 힘은 이런 고민들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는 점? 좀 더 멀쩡하게 존재하기 위해 골똘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 이런 시답잖은 얘기들을 늘어놓을 시간을 낼 수 있다는 점?




#시골살이 #귀촌 #귀농



글. 느림

부안의 작은 시골마을로 이주해오고 텃밭농사와 집주변을 가꾸며 2년째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