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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 | 81호여기 사람이 있다 | 투쟁하지 않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 이형숙 대표 이야기 /한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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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사람이 있다 ]


투쟁하지 않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형숙 대표



어제 우리 노들 센터에 장애인 상근자 네 명이 모여 나눈 이야기에요.  


50대: 나는 학교갈 때 엄마가 데려다주지 않으면 못 갔어.

40대: 나도 그랬어.

30대: 나도 그랬어.

20대: 나도 그랬어.


50대: 나는 9살에 학교 갔어, 7살에 들어오는 애들이랑은 두 살이나 차이가 나, 창피했어.

40대: 나도 그랬어.

30대: 나도 그랬어.

20대: 나도 그랬어.


50대: 화장실 가기가 어려워서 급식도 못 먹고 참아야 했어.

40대: 나도 그랬어.

30대: 나도 그랬어.

20대: 나도 그랬어.


세상에 어떻게 67년생하고 95년생이 학교 다니면서 똑같은 일을 겪었을까요? 

30년이 흐르도록 우리 세상은 왜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까요? 



변한 게 있다면 화장실 정도? 67년생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일명 ‘푸세식’ 화장실이어서 학교 급식도 못 먹고 다녔다면 95년생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이 학생을 위해 좌변기를 설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도 한 층에만 설치해서 학년이 올라가서는 또다시 어려움에 봉착했다고.   

변한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 변해야 할 게 많다. 장애인 이동권도 그렇다. 


버스 아래 들어가 외치다

지난 3월 26일은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출범식이자 17회 전국장애인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장애인의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외치며 죽음으로 항거한 최옥란 열사의 기일인 3월 26일부터 노동절인 5월 1일까지 전장연은 매년 ‘장애인차별철폐’를 위한 집중 투쟁을 해왔다, 

대회 장소인 세종시청에 가기 위해서는  KTX를 타고 오송역에 내려 B1버스를 타야 하는데 정작 B1버스 중에는 장애인이 탈 수 있는 저상버스가 한 대도 없다. 

명색이 ‘행정수도’이면서 장애인의 이동권은 나 몰라라 하는 세종시의 시내버스 저상버스 도입률은 23%(2019년 저상버스 도입현황 참고)로 전국에서 꼴찌이다. 장애인 콜택시도 17대뿐이다. 


이형숙 대표는 오송역 앞에서 비장애인만 싣고 떠나는 버스를 붙잡았다. 나도 태워달라고, 나도 세종시청에 가야 한다고. 급기야 버스 아래 들어가 마이크를 들고 이렇게 외쳤다.       

“장애인도 B1버스 타고 세종시청 가야 합니다. ‘3.26장애인대회’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장애인도 버스 타고 싶다고 하니 정류장 옮겨서 왜 비장애인만 태우고 홀라당 가려고 합니까? 왜 장애인은 버리고 가려고 합니까. 장애인은 대한민국 사람 아닙니까? 이렇게 버려도 됩니까? 더 이상은 못참겠습니다. 더 이상 참지 않겠습니다. 장애인도 버스 타고 싶습니다!”


오송역 B1 버스 아래에서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는 이형숙 대표. 오송역에서 세종시청까지 가는 B1 버스 중 저상버스는 한 대도 없다. 60여 개의 세종시 버스 노선 중 저상버스가 도입된 노선은 6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형숙 대표의 이러한 외침을 외면했다. 임시로 만든 정류장에서 비장애인 승객을 실은 버스는 유유히 정류장을 빠져나갔다.    

참으로 비장애인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버스를 붙잡고 있으면 다른 버스를 타면 되고 정류장을 점거하면 임시로 다른 정류장을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허나 장애인에게는 저상 버스가 없으면 세종시청에 갈 수가 없다, 


이 날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아래 420공투단)은 세종시청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세종시에 장애인차별철폐를 위한 7대 정책요구안을 발표했다.



     <세종시에 요구한 7대 정책요구안>

  • 장애인 이동권 증진을 위한 선언 약속 
  • 최중증장애인 노동권 
  • 장애인 평생교육권리 
  • 장애인탈시설권리 선언 약속 
  • 지속가능한 장애인자립생활 지원 기반 확대 
  • 장애인주치의제도 및 의료접근성 강화 
  • 발달장애인 권리 보장 및 지원 강화



세 번의 노역, 투쟁 없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2021년 3월 18일 이형숙 대표는 투쟁 과정에서 부과된 벌금을 4440만원을 감당하기 위해  박경석•최용기•권달주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와 함께 노역에 들어갔다. 2015년과 2017년에 이어 세 번째 구치소행이다. 

“노역에 들어가기까지 지진하고 지난한 재판과정이 있어요. 투쟁의 과정에서 날아온 벌금형에 대해 항소하고 상고하고, 어떻게 해서든 벌금을 깎아야 하니까요. 그 재판 과정을 겪다보면 화가 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이유없이 싸운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정부에게 정당한 요구를 한 것인데, 막상 재판정에서 우리는 영락없이 ‘범법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거지요. 판사는 ‘그래서, 도로 점거했는가 안 했는가?’만을 물어요. 왜 점거했는가는 묻지도 들으려 하지도 않아요. 재판을 하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법이라는 게 절대로 평등하지가 않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싸울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는 다행히 많은 동지들이 마음을 모아주어서 3일 만에 나올 수 있었다. 

“이번에는 벌금이 많아서 일주일 정도 예상했는데 많은 동료들과 사민단체에서 모금을  해주셔서 빨리 나올 수 있었어요. 면목 없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이 크지요. 함께 투쟁을 하고 연대의 마음을 내어주는 것, 그런 힘으로 다시 열심히 투쟁할 수 있는 기운이 생겨요. 그러고 보면 전장연이 벌금을 꽤 많이 내요. 이번에도 리프트 차량 압류까지 될 지경에 이르러서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지요. 벌금은 지금도 계속 쌓이고 있고 또 날아올 거에요.”

작년만 해도 너덧 건의 고지서가 날아왔는데 그 중 하나는 공직선거법 위반. 황교안 국회의원 후보에게 장애인 비하 발언에 대해 사과하라고 한 것이 선거법 위반이라고 했다. 그것도 선거유세중에 통보했다고 가중처벌까지 적용되었다. 2019년 서울시청 앞에서의 농성도 특수공무방해죄 적용을 받아 벌금이 날아온 상태이다. 벌금으로 입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형숙 대표를 비롯한 전장연 활동가들은 외친다.

“돌아가지 않겠다! 투쟁 없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2021년 3월 18일 이형숙 대표는 투쟁 과정에서 부과된 벌금을 4440만원을 감당하기 위해  박경석•최용기•권달주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와 함께 노역에 들어갔다.


구치소 안에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사람의 활동 영역이 닿는 그 어느 곳도 장애인이라고 예외인 곳은 있을 수 없다. 그곳이 구치소나 교도소라 할지라도 먹고 자고 화장실 사용 등 장애인의 일상은 보장되어야 한다. 허나 세 번의 구치소 수감 과정에서 장애인 시설은 한 곳도 볼 수 없었다. 

“첫번째 두 번째 들어갔을 때는 거기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 도와줬어요.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무조건 독방을 써야 했어요. 화장실도 못 가고, 밥 받으러도 못 가고 아무것도 못한 채 땅바닥에 그냥 앉아 있어야 했어요. 밥은 그나마 거기 소사가 갖다 주었어요.”

척수장애인에게 휠체어는 몸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구치소에서 휠체어 반입은 아예 불가능했다. 수감된 어느 방도 휠체어를 이용할 공간이 없다. 앉아 있을 수조차 없는 척수장애인은 하루종일 엎드려 있어야 하는 실정이다.   

“4인실이라 해봤자 2평 정도 크기로 4명이 누우면 딱 맞을 크기의 방이에요. 화장실도 한 사람 몸이 들어갈 정도로 휠체어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요. 서울구치소의 경우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든 곳에 장애인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한 곳도 없어요. 이번에 구치소 인권국에 국장을 만나서 최소한 남녀 각각 한 곳이라도 장애인화장실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구했어요.”

설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수감자의 ‘인권’을 유린하는 것은 국가가 행하는 또하나의 범죄이다. 

“거기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라 해서 어떤 요구도 불가능해요. 우리는 그래도 사회 활동하다가 들어와서 그나마 말을 들어주지, 인권 이슈를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단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삭발, 부양의무제 폐지하라!

2020년 8월 7일, 이형숙 대표는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아래서 삭발을 했다, ’장애인과 가난한사람들의 3대 적폐폐지 공동행동(아래 공동행동)' 집행위원장으로서 부양의무제 폐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부에 대한 강력한 항의였다.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부에 대한 항의로 이형숙 대표는 삭발을 하고, 자른 머리카락을 흰 상자에 담아 보건복지부에 보냈다.


부양의무제 폐지를 촉구하기 위해 전장연은 1842일 동안 광화문 해치마당에서 농성을 했다. 2017년 문제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하겠습니다”라고 똑똑히 말했고, ‘탈시설’도 대선 공약 중 하나였다. 당선 이후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광화문 농성장에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의 뜻이라며 장애등급제 폐지와 부양의무자기준의 폐지, 그리고 탈시설 정책을 만들어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임기가 다되어가는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는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그 약속 믿고 농성장마저 접은 이 시점에서 이형숙 대표는 삭발로 저항했다.


광화문 농성 1831일째인 2017년 8월 25일, 농성장을 찾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이 날 박 장관은 장애등급제 폐지 및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을 통한 중증장애인의 지역사회 독립생활 지원, 탈시설, 지역사회 중심으로 장애인 정책 방향 전환, 부양의무자기준 단계적 폐지 등을 약속했다.

출처 : 비마이너(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99)


삭발하기 열흘 전, 이형숙 대표는 어머니를 멀리 떠나보냈다. 병세로 보아 통증이 꽤 심하셨을 터인데 아픈 내색 없이 지내시던 어머니는 심근경색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3일만에 돌아가셨다. 

이형숙 대표는 어머니의 죽음과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는 무관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장애를 가진 딸에게 자신의 통증을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병원비’를 걱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걸 이형숙 대표는 알고 있다. 장애가 있어도, 가난해도, 존엄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이어나갈 권리가 바로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라는 것



일주일 전에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동안 큰 병 없이 여든 다섯 해를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새벽에 응급실에 실려 갔고 의사는 미리 정기검사를 했었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사 말이 본인은 숨 쉬는 것조차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 했습니다. 아마 엄마는 내가 돈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파도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무도 가슴이 메어왔습니다. 엄마를 한번만이라도 정기검사를 받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을 못한 것이 뭐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인입니다.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하지 않으면 국가는 살인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고 싶습니다. 불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난해서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2020. 8. 7 <삭발투쟁 결의 및 투쟁동참> 호소문 중에서


정부가 발표한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을 보면 의료급여에서의 부양의무자 기준은 폐지되지 않았다. 생계급여에도 부양의무자 기준을 계속 적용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박능후 장관 광화문 농성장에까지 찾아와 한 약속은 무엇이었던가? 박 장관은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위의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의료급여에 있어 부양의무자 기준의 폐지는 약속한 적이 없다”고 했다.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은 앞으로 3년 간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발전 방안이에요. 지금 이 계획에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 문구를 담지 않으면 다음 정권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럼 희망이 없어요.”  

7명의 삭발을 불사한 저항은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 폐지’를 부가 논의 사항으로 얹어놓는 데 그쳤다. 그래도 여지를 남겨 놓았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겠으나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정부에 대한 분노는 사그러들지 않는다.   



비장애인처럼 살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했던 착한 장애인

“40세 이전까지 나는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마음이 없었어요. 비장애인 세상에서 비장애인처럼 살아야 인정받을 수 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있고 불편한 게 있잖아요. 그래서 기를 쓰고 살았지요. 가난한 사람이 부자처럼 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빚을 내서라도 궁색맞지 않게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것과 같았지요. 장애를 가진 내가 생활하는 데 제약이 있는 것은 이 사회가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지요.” 

열 살 터울 오빠 아래 둘째로 태어난 이형숙 대표는, 바깥살림을 차린 아버지가 돌아오길 바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이 태어났다. 그렇게 얻은 딸이 아장아장 걷던 세 살쯤 되던 해 소아마비를 앓은 후 한번 뉘어놓으면 하루종인 꼼짝 않고 있어야만 하는 딸을 보면서, 어머니는 더이상 남편을 불러들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어 어머니는 그이의 유일한 의지 대상이었던 아들을, 살을 도려내는 마음으로 제 아버지의 새살림집으로 보낸다. 아들이 경제적으로 나은 환경에서 번듯하게 자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장애를 가진 딸 양육에 집중하기 위한 아픈 판단이었을 터이다.   


이형숙 대표의 백일 사진. 바깥 살림을 차린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으로 낳은 딸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에 흥성거림이 온나라를 뒤덮던 시절, 이형숙 대표는 고등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하루종일 아시안게임 매스게임 연습만 했다. 처음에는 학교에서 하다가 나중에는 종합운동장에 가서 연습을 하고 왔다. 이형숙 학생은 착한 장애인으로 하루종일 교실을 지켰다. 연습을 하고 온 반 친구들의 대화는 거의 매스게임에 관한 것, 그 대화에 이형숙 학생은 낄 틈이 없었다, 그런 형숙 학생에게 선생님들은 ‘너는 이렇게 몸이 불편한데 훌륭해’ ‘교실 지키느라 힘들지?’ 이런 말을 하며 다독였다. 그 때는 그게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내가 장애 운동을 알았더라면 가만 안 있었을 텐데. 선생님들이 장애 비하도 엄청나고, 마음을 아주 후벼팠어요.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렇게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공부는 무슨 공부, 공부해서 뭘 하겠어 하는 반항심도 생겼어요.”



뭐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졸업 즈음부터 이형숙 대표는 당시 솜씨 좋기로 내로라 하던 이모에게 한복 기술을 전수받았다. 열심히 한복을 지었지만 내 손에 잡히는 돈은 없었다. 당시 6.25 등 험난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혼자된 이모들은 생활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도와가며 자녀를 양육하며 생활을 이어나가던 터였다. 장사를 하는 엄마의 육아 빈틈을 메워주던 이모들, 그 이모들은 하나 같이 가난과 싸우며 살아야했고 마땅히 배운 것이 없다보니 이래저래 사기도 당하고 빚을 지고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그 과정에서 이모의 보증 요구를 마다하지 못했던 이형숙 대표는 1억원이 넘는 빚을 떠안게 되었다. 

대학을 가는 일은 언감생심, 당장 일을 해서 빚을 갚아야 했다. 남들 하루에 4벌도 힘들다는 깨끼저고리를 7벌이나 만들었다. 48시간을 눈 한 번 못 붙이고 일에 매달린 적도 있었다. 동도 돈이지만 약속을 지키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는 했지만 재미는 없었어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결혼 후에는 집에서 한복 일을 할 상황이 안 되어 보험설계사를 시작했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2천만 원씩이나 빌려주던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 빚은 어찌되었든 갚아야 하는 돈이었어요. 그 친구들 이름으로 보험을 들어 성과급을 받아서 친구들 명의의 보험금을 갚는 형식으로, 5년이 되어서야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는데 요즘 들어 친구들에게 소식이 와요. 그 때 그 보험이 만기가 되어 타게 되었다고요.”

보험회사에서도 해약이 거의 없는 실한 계약을 하는 유능한 사원이었다. 그래도 남은 가난 속에서 화장품 판매 등 여러 일을 하면서 모진 시간을 아주 열심히 살아냈다.


장애인 사회에 발을 들이다

1993년 결혼을 하고 94년에 낳은 딸 은별이 중학교 다니던 때였다. 사촌에게 컴퓨터를 받아 집에 설치하던 날, 딸이 이형숙 대표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컴퓨터를 못 해?” 

뭐든 열심히 잘해온 이형숙에게 그 말은 충격적으로 들렸다. 당장에 배우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섰다. 어떻게 배우지? 돈을 들여서 배우기는 그렇고 해서 찾은 곳이 무료로 컴퓨터를 배울 수 있는 장애인직업학교였다. 

 

뭐든 열심히 하는 이형숙 대표는 컴퓨터도 열심히 배웠다. 얼마 안 가 웹마스터 자격증을 따고 장애인기능대회에서 상도 받았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장애인 사회에 발을 들여 놓은 점이다. 그 과정에서 장애여성 자조모임 ‘누리보듬’ 회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더 많은 장애인들과 연결되었다. 그러면서 만난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그리고 장애운동 동지들. 그들과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착한 장애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그이의 맘 한 구석에 남아 있던 석연찮음의 정체를. 장애인이라고 해서 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님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 권리를 찾지 못해서 그런 것임을.  

웹마스터 자격증을 활용해 장애인 가정을 방문, PC에 대한 상담을 해주었는데 여러 상황에 놓인 장애인들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방문교육을 하면서 말하자면 장애인식 교육을 한 셈이에요. 근육장애가 있는 학생을 학교에 데리고 다니기 힘들어 하는 어머니에게 그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며 이런 것이 제도화할 수 있도록 정부에게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다녔어요.”

2008년도에 의정부세움장애인자립생활센터장을 맡은 데 이어 경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장을 맡았다. 2011년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를 맡으면서 장애 운동에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당시 의정부에서 활동보조 서비스 증대를 도모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형숙 소장은 활동지원 대상자 98명 중 50명 이상을 만나 활동서비스 현황과 문제점 등을 파악했다. 공통적 의견은 서비스 시간의 절대부족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늘여 달라 하면 줄 리 없는 활동보조 시간이었다. 경기장차연은 의정부시를 대상으로 활동보조 서비스 확대를 위한 싸움에 들어갔다. 경기도에서 지자체를 대상으로 한 싸움으로는 처음이었다. 


“그 때 참 잘 싸웠어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계단을 기어올라가 싸웠어요. 그 결과 의정부시에서 독거장애인에게 80시간씩 활동보조 시간을 주었어요. 활동보조 이용 시간이 늘어나니까 장애인들이 투쟁 현장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시장실을 점거하는 등 가열찬 싸움도 가능했어요.


활동보조 시간 확대를 위한 장애인생존권 확대요구 투쟁 농성장에서. 활동보조 서비스가 진작에 있었더라면 학교 생활이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생각하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이형숙 대표를 가열찬 투사의 길로 이끈다.


처음에는 집회는 익숙치 않아 모든 게 당혹스러웠다. 왜 도로로 나가 길을 막는지, 경찰들은 또 왜 장애인을 강제로 끄집어내는지.

“인권에 대한 이런저런 강의를 들으면서 왜 싸워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이건 우리의 권리이다. 내가 어릴 때 느꼈던 미안함, 내가 만일 엄마의 도움을 안 받고 친구들 도움도 안 받고 당당하게 학교 다닐 서비스가 있었더라면 내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이게 화가 나는 거에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나를 자꾸 움직이게 했어요.”



김포센터 문을 열다

2012년 10월 29일에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파주의 한 가정에서 부모가 일하러 간 사이 남매만 있던 집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그 화재로 인해 뇌병변1급 중증 장애를 가진 열한 살 박지훈 군과 지훈군을 돌보던 열세 살 누이 박지우 양이 질식한 채 구조된 사건이었다. 박지우 양은 11월 7일에 사망하고, 이어 박지훈 군도 12월 13일에 사망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장차연에서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고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항의할 예정이었으나 남매의 부모는 누구의 종용을 받았는지 하룻장을 치르고 발인을 하겠다고 했다. 서울에의 장례가 취소되고. 이형숙 대표는 일산의 한 병원에서 혼자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 때 딸 조은별 님이 엄마 혼자 있다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왔다. 하루만 있다가 엄마와 함께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튿날 발인을 앞두고 운구차량이 도착했다. 그런데 그 운구차량은 보통 장례식에서 쓰는 리무진이 아니라 앰블런스였다. 장례도 하루 일정에 앰블런스를 타고 화장장으로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부모는 마음을 바꾸어 서울대학교에서 3일장을 치르겠다고 말했다. 

일정은 급박하게 변경되어 시신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혼자 운구차량에 탄 사람은 하루 엄마 곁에 있겠다고 나온 조은별 님이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시신을 뺐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요.”

서울에 빈소가 마련되면서 많은 이들이 조문을 왔고, 12월 15일에는 보건복지부 청사 앞에서 노제를 치렀다. 


화재로 사망한 박지우 박지훈 남매의 노제를 치르는 이형숙 대표. 남매의 사망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 활동지원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형숙 대표는 “내가 어렸을 때에도 전적으로 부모가 책임을 져야만 했는데 2012년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울분을 토하면서 “산 자로서 미안하고 부끄럽지만 우리는 죽고 싶지 않다. 우리 모두 더는 죽지 않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자”고 강한 의지를 다졌다.

이 일은 이형숙 대표는 물론  현재 김포센터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딸이자 동지인 조은별 님에게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만들 거에요!

의정부에서 활동하던 중에 김포 어디에 있다는 임대아파트에 당첨되었다. 미분양 아파트이다 보니 위치는 어디이고 살 만한 곳인지 가보자 싶어 두 딸과 함께 길을 나섰다. 

아파트 신축공사장은 버스도 닿지 않는 곳으로 정류장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가는 길에는 친절한 버스기사님이 이형숙 대표를 들어올려 버스에 태워 버스 노선에서 벗어난 공사장 가까이까지 가서 내려 주었다. 아직 포크레인 공사를 하는 아파트 터는 대중교통도 편의시설도 모두 없는 황무지였다.

날은 저물고 발은 자꾸 진 땅에 빠지고 돌아갈 길이 막막했다. 하는 수 없이 119를 불러 검암역까지 타고 나왔다. 

오는 길에 만난 사람들이 그랬다. 

“여기 이사오지 마세요. 암것도 없어요. 그냥 의정부에 사세요.” 

그 때 모녀는 자신있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만들 거에요!”


아파트가 완성되고 김포로 이사오면서 이형숙 대표는 정말로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려면 센터가 있어야 했고 마침 석암 싸움이 있던 차에 그 동지들과 조직해서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만들었다. 2011년 1월에 3‧26대회 때 보신각 앞에 둘러앉아 운영위를 한 것을 시작으로 2012년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문을 연다. 


“그 때 김포에는 저상버스 두 대가 있었어요. 순환버스 같은 거. 한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데 리프트가 고장나서 안 내려와요. 그거 고치려면 400만 원 든다고 우리가 탈 때마다 승강구에 널판지 대주는 그런 차였어요. 그거 타고 다니면서 싸워서 지금은 저상버스 33%를 만들었어요. 당시에는 장콜도 없었는데 2년 싸워서 2013년에 생겼어요.”

이후 이형숙 대표가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으로 옮기면서 조은별 님이 사무국장으로 업무를 맡고 있다. 엄마와 딸의 관계를 넘어 지금은 장애운동이라는 길을 함께 가는 동지가 되었다.  



노동, 가치와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  

백기완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2월 19일 서울광장 영결식에서 이형숙 대표는 장애인 활동가를 대표하여 조사를 낭독했다.  

 

동지들에게 질문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장애인 동지들과 함께 노제에 참석하는 것이 노동일가요? 백기완 선생님께 여쭤 봤다면 아마도 노동이 맞다고 하셨을 겁니다. 투쟁하는 공간에 장애인도 있다고 알려내는 것, 이 사회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당당히 인정받고 권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투쟁하는 것 또한 노동입니다.


백기완 선생의 열결식에서 왜 장애인의 노동을 이야기 했을까? 이형숙 대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노동’의 의미로는 장애인의 노동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사회에서 ‘노동’ 하면 성과가 나야 하는 거라고 합니다. 고용노동부에서도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은 노동이 아니래요. 그렇다면 성과 내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최중증장애인의 노동은 어찌합니까? 노동의 철학, 노동의 가치가 바뀌어야 합니다. 성과 나는 것만을 노동으로 본다면 장애인은 노동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노동은 성과가 아니라 사회참여입니다. 이 협약에 맞게 사회참여라는 가치로 변화해야 합니다. 최중증장애인의 권리옹호 활동도 노동이고, 문화예술을 배우는 것도, 장애인식개선교육도 노동입니다.”


이형숙 대표가 출전한 싸움판에는 장애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가 배제되지 않는 세상.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약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바라본다. 

“백기완 선생 돌아가신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백기완 선생님처럼 평생을 한 길로 가면서 싸울 수 있을까?’ 백기완 선생님이 그러신 것처럼 나도 죽는 날까지 이 세상 부당함에 맞서 큰 판 한바탕 벌이며 싸워볼 생각이에요.”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이형숙 대표는 ‘여성’이자 ‘장애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보다는 ‘장애’가 더 부각되지요. 그러다보니 나의 여성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해요. 예를 들어 여성으로서 생리를 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 ‘너도?’라는 반응 받는 여성장애인이 많아요. 제 어머니도 내가 생리를 시작하니 걱정이 많으셨어요. ‘네가 생리를 해서 어떡하면 좋으니..?’이러시면서요,”

출산 과정에서도 장애 여성의 분만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을 가진 의사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형숙 대표의 경우 자연분만이 가능할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자궁 문이 10센티나 열렸는데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요추의 손상으로 출산에 필요한 힘을 주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의사도 본인도 그제서야 알았다.

“급히 대학병원으로 이송하는데 그 와중에 의사라는 사람이 그러더라구요. 산모나 아기 둘 중 하나는 죽을 거라구요. 산모가 출산할 수 있는지 없는지, 장애인이라고 다 허리에 힘을 못 주는 게 아니잖아요. 어떤 장애인은 가능하고 또 어떤 장애인은에게는 어려운 일이지요. 그걸 의사가 미리 판단을 했어야지요. 의사가 장애 여성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라요, 그래서 차별받는 게 많은 거지요.”

 

진료 과정에서도 의료 종사자들의 낮은 장애 감수성으로 인해 잦은 차별 상황이 일어난다.  장애인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물어봐야 할 것을 자기들이 판단하고 지시한다. 

“검진 과정에서 장애를 가진 내가 이러이러한 걸 못 한다고 말하니 ‘애도 낳았으면서 그런 걸 못하냐’고 빈정대는 의사도 있어요. 심지어 코로나 때문에 그런다면서 나를 잡아주는 것조차 혐오스러워하는 간호사들도 있었고요. ‘내가 왜 혐오스럽냐?’ 따져 물었어요. 이런 식이라면 기분 나빠서 검사 못 받겠다고 했지요.”



살면서 정말 잘한 일, 장애운동

이형숙 대표 지금까지 55년을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은 '장애인 운동을 시작한 일'이라고 한다. 착한 장애인으로 기를 쓰며 살아온 시절, 뭔가 아니다 싶으면서도 그 원인은 모두 자신의 장애로 귀결시키며 열심히 살아온 시절을 떠올리면, 내가 왜 진작 장애운동을 만나지 못했을까 하는 회한도 밀려온다고 한다. 


뭐든 열심히 하는 이형숙 대표는 투쟁 현장에서 늘 가열차게 싸운다.


“장애운동을 하기 전에는 내 삶을 어디에 중점을 두며 살아야할지 몰랐어요. 말은 못하지만 장애인으로 상처를 받으면서 살면서도 계속해서 비장애인들의 삶에 끼고 싶어하며 살았던 거지요. 그런 불안한 상태에서 나의 미래를 생각해보니 보이는 게 없더라구요. 장애 운동하면서 내가 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내며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게 가능해졌어요.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또 나를 보면서 변화를 하는 동지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렇게 살아온 지금, 이형숙 대표는 삶의 만족도는 ‘100퍼센트’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이형숙 대표의 주요 활동>

     2008년 의정부세움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2008년 사)경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2011년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2012년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공동행동 집행위원장

     2014년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2017년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2018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2020년 사)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