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2024.03 | 밥통 115호

21.02 | 78호밥알단 연대기 | 현재의 얼굴들 /박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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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알단 연대기 ]


현재의 얼굴들

박용석(전국건설노동조합 수도권북부지역본부 사무국장)


옛 가르침은 때론 고리타분하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래를 결정짓고 싶다면 과거를 공부하라’는 공자님 말씀에 담긴 정신이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인 ‘LG그룹’ 로고에 그냥 쓸데없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의 얼굴, 미래의 얼굴’을 형상화 했다는 로고를 쓰고 있는 자신들의 현재가 어떤 얼굴인지도 모르면서 1등 기업이 되겠다니 소도 웃을 일이 아닌가 싶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 그런 역겨운 얼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날, 여의도 쌍둥이 빌딩 앞 길바닥에 국이 쏟아졌다. 기왕에 쏟아질 국이었다면 금수만도 못한 구광모란 작자의 면상에 철철 쏟아졌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쏟아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서로를 탓하지 않는다. 십시일반 서로의 마음들을 모아 온 귀한 국과 반찬, 밥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그 감사한 마음이라는 기본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세상 안 바뀌어요. 차라리 손주들 용돈이나 주쇼. 진짜 싸움은 내가 할게.” 언젠가 밤을 세워 고공농성장에 가져갈 반찬을 만드느라 몸살이 난 어머니에게 비아냥댔던 기억이 난다. 막내아들의 비아냥은 상관없이 간 좀 보라며 김이 모락 올라오는 나물을 입에 넣어주시곤, 주둥아리 놀릴 힘 있으면 반찬통이나 닦아 놓으라던 어머니셨다. 생각해보니 말로라면 새파란 어린 것 이기지 못할 분이 아니시지만, 열마디 말보다 행동이 더 큰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지난해 봄, 자신의 통장에 마지막 남은 잔고를 털어, 마사회 문중원 열사의 미망인과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에 전해달라는 말이 유언처럼 되어버린 어머니셨다. 구광모란 배우지 못한 자와는 달리 훌륭한 부모에게 미래를 결정지어야 할 현재의 얼굴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어렴풋이나마 배울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생전 어머니가 즐겨 타시던 밥차. 밥통에 함께 했던 하루는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누군가의 가게를 깨끗이 하겠다는 업,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분들의 노동이 어머니에 비유되곤 하는 것은 그래서 양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나에게 따듯한 밥을 지어주시고, 집안을 말끔히 청소하였지만, 그런 어머니의 노동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과거들이 있었다. 그러나 작금의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분담되어야 했으며, 존중받아야 하고 감사히 여겨져야 한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아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과거에도 감사히 여겨졌다. 기본조차 모르는 이는 미래를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다. 그런 이에게 우리의 미래는 물론, LG의 미래조차 맡겨서는 안될것 같다.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차가운 날씨에 누군가를 몰아내기 위해 난방마저 꺼버리는 것은 정말이지 인간이길 포기한 처사다. 심지어 그 냉골에서 겨우 먹는 밥상까지 엎어버리는 것은 금수만도 못하다는 말이 딱 맞다. 그분들이 자신의 가게를 치워주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어떤 인간도 인간을 그리 대해서는 안 된다. ‘인간 존중의 경영’을 경영이념의 한 축으로 삼는다는 그룹이 제 말조차 손바닥 뒤집듯 한다. 그럴싸한 말들로 분칠한 정치와 경제의 민낯들이 지금 여의도 한복판에 있다. 인간사의 기본보다 금전이, 그 금전으로 세운 쌍둥이 빌딩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본의 시대라지만 정도를 넘었다.

누군가 내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 한다면, 누군가 나의 집을 깨끗이 청소해준다면, 마땅히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이 인간사의 기본일 것이다. 그런데 나이 사십이나 넘어 불혹을 넘겼다는 구광모란 재벌그룹 LG의 총수는 그러한 마음조차 들지 않는가 보니 금수가 따로 없다. 혹자의 말로는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이라는데 어미, 아비에게 배운 것조차 없는가 보다. 아니면 인의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군자의 정신은 아랑곳없이 허례허식에 빠져 양반노름이나 했거나.

자신의 억울함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노동자들을 돕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보니, 나름으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사람은 쉽게 부당함에 맞서 싸울 각오를 세우지 못한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결심이며, 그렇게 결연히 싸운 결과가 늘 승리인 것도 아니다. 때론 처참한 패배이고, 그 과정 자체가 극기의 고통이다. 웬만한 손해는 감수하며 살아온 삶의 주름을 넘어서는 과정이 어찌 한두마디 말로 설명이 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자신과 생면부지의 사람을 돕고자 단지 금전이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일 또한 그렇다. 

그날, 여의도 쌍둥이 빌딩 안팎에 있던 얼굴들, 미래를 결정지어야 얼굴은 어떤 얼굴이어야 할지를 생각했다. 솔직히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결정하라는 큰 가르침은 잘 와닿지 않는다. 지난 과거가 그랬듯, 당장의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재니까. 생각하고 탓할 시간에 밥 한번 더 뜨고, 국 한번 더 푸는 것보다 나은 일도 없다 싶었다. 미래의 얼굴까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의 얼굴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 쌍둥이 빌딩 안팎에서 따듯한 밥 한끼의 온기, 투쟁의 열기를 서로에게 전하는 현재의 얼굴들이 우리의 미래, LG의 미래를 결정지어야 할 것 같다는 것을.


2021년 1월 7일,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 ‘밥통’과 함께


 

박용석 사무국장은 밥통과 함께 밥알단으로 활동해 주신 고(故)백완승 님의 막내 아들로  현재  전국건설노동조합 수도권북부지역본부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7일 LG트윈타워 출동 때 밥알단으로 함께하면서 살아생전 밥 연대에 뜻을 두셨던 어머니 백완승님을 함께 기억하며 추모했습니다. 다시 한번 백완승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