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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 | 밥통 115호

20.01 | 66호밥알단 연대기 | “밥통”이 전한 ‘돌봄’-식구(食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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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단 연대기]


“밥통”이 전한 ‘돌봄’-식구(食口)

신배경 클라우디아 (가톨릭거리기도회)


해를 넘기고야 말았다. 김용희님의 정년이 지나고, 이재용님의 정년이 지나고, 농성장의 숫자판은 200일을 넘어섰다. 2019년이 그렇게 가버렸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떠올리게 할 ‘새해’가 강남역 사거리 한복판의 철탑과 천막을 바라보는 눈에는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작년 여름에는 추석 전에 해결되기를 기대했고, 추석에는 겨울이 오기 전에 해결되기를 기대했다. 농성일이 99에서 100으로 넘어가던 날 많은 사람들이 농성 100일을 알리는 사진과 영상으로 마음을 모았을 때, 200일 전에는, 2020년이 오기 전에는 두 분 모두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염원했었다. 두 분이 가족과 함께 한 식탁에 둘러앉아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신 날이 언제였을까. 


작년 여름, 강남역 사거리 한복판의 철탑 위에 사람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루에도 수 없이 올라오는 뉴스를 속에서도 유독 일상을 파고드는 메아리가 있기 마련이다. 강남역 농성장 소식이 그랬다. 넘어가지지 않고 목 언저리에 얹혀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연을 마주하러 강남역 농성장을 찾았던 그날 비가 내렸다. 서울에서 하루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는 강남 한복판. 철탑 위에서 ‘한 생명’이 곡기를 끊고 불볕의 더위와 습기를 받아내던 맨 몸으로, 들이치는 비를 맞고 있을 터였다. 시간이 갈수록 참담함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현장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 앞에서, 비를 가리겠다고 우산을 부여잡고 있는 내 손이 부끄러웠다. 도착하니 아는 얼굴들. 거리에서 늘 마주치던 그 얼굴들이 보였다. 서로 만날 일이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건만 익숙해져가는 얼굴이 늘어가는 것이 반갑지 않았던 밤. 그 여름밤이 첫 걸음이었다.


어느 날 농성장을 찾아오신 살루스 수녀님과 만나서 가톨릭의 현장연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가톨릭신자들의 현장 연대는 대체로 미사가 시작되면 모여서 함께 미사 중심의 연대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강남역 농성장에서는 거리기도회를 일단 시작하기로 했다. 수녀님께서 기도회 준비와 더불어 신부님이 오시는 날에는 언제든지 제대를 차릴 수 있도록 미사도구를 준비해 주셨다. 신부님께서 오시는 날에는 미사를, 신자들만 모이는 경우에는 기도회를 진행하기로 하고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님‧이재용님 연대 가톨릭거리기도회’를 시작했다. 강남역 농성장에 ‘가톨릭거리기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신자들, 수녀님들과 함께 철탑이 바라다 보이는 8번 출구 앞에서 8월 17일 첫 기도회가 있었다. 한 여름 내리쬐는 불볕을 ‘나누어’ 맞을 수는 없겠지만, 삼성해고노동자 두 분의 일상이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상을 접고 거리로 나온 이들과 함께 하는 기도는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누구를 내 이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가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듯, 이웃의 고통을 ‘나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또한 선택의 영역이다. 바라봄을 넘어서 ‘돌봄’을 선택한 이들의 발걸음이 선한연대를 이루어 이웃의 생명을 이어가게 할 울타리가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헨리나웬은 <살며 춤추며>에서 ‘돌봄의 본질’에 대해 “참된 돌봄은 모호하지 않다. 참된 돌봄은 무관심을 배제한다. 돌봄은 냉담의 반대말이다. ‘돌봄-care’은 슬피 운다는 뜻의 고트어 ‘kara(카라)’에서 왔다. ‘슬퍼하다, 슬픔을 겪다, 함께 울다.’가 돌봄의 기본 뜻이다.”, “인간의 고통에 깊숙이 들어가 자신의 아픔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사람들에게 줌으로써 치유할 힘을 얻는다. 그런즉 누가 누구를 돌본다는 것은 무엇보다 함께 있음을 뜻한다.”라고 했다. 함께 있는 것, 함께 슬퍼하는 것, 함께 우는 것이 바로 이웃을 ‘돌봄’이다.


이웃을 돌보려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어떠한 ‘돌봄’이라도 손을 내민다. 현장에 오는 이들을  바라보면, 연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돌봄이 구체화 되고, 돌봄의 지평이 확장 되어감을 보게 된다. 누군가는 늘 곁에 함께 있어주고, 누군가는 서로를 연결해주고, 누군가는 기도를 하고, 누군가는 농성자의 건강을 챙긴다. 누군가는 노래를 하고, 누군가는 영상과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청소를 하고, 누군가는 웹자보를 만들고, 누군가는 번역을 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농사지은 먹거리를 나누기 위해 찾아오고, 누군가는 현장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현장을 찾는 모두는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으며 농성당사자의 기운을 북돋고, 농성이 이어져 갈 수 있도록 각자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애쓴다. 강남역 농성장에도 그렇게 모인 발걸음들이 200일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이웃을 위한 ‘돌봄’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밥’이야말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절대적 필요가 되는 기본이다. 하루 두 번 철탑 위의 김용희 님에게 ‘밥’을 올리고, 천막의 이재용 님과 그 곁을 함께 지켜주는 동지들을 위해 ‘밥’으로 연대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농성장을 찾을 때 마다 어김없이 보게 되는 크고 작은 밥통과 반찬통. 그리고 보온병. 볼 때마다 숙연해지는 마음은 쌀을 씻어 밥을 짓고, 국을 끓여 강남역까지 찾아왔을 누군가의 온도가 와 닿기 때문이다. 그 안에 담긴 밥은 단순한 ‘식량’이 아닌 이웃의 생명을 지키고 싶은 선한 이들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차에 싣고 전국의 현장을 다니는 이들이 있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밥통”을 지난 11월 강남역 농성장에서 다시 만났다. 현장에서 “밥통”이 보이는 날이면 뭔지 모를 뜨거움이 느껴진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더라도 어느 현장에서나 보아왔기에 그동안의 현장을 함께 한 듯 친숙한 느낌과 함께 ‘보이는 밥’에 실린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길’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평화로에서 소녀상을 지키던 이들을 위해 달려왔던 겨울밤 ‘빨간앞치마’를 두른 손이 전해주었던 북어국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온기로 남아있다. 


그동안 강남역 농성장에도 “밥통”의 연대가 여러 번 있었는데, 11월에는 마침 ‘가톨릭거리기도회’가 있던 날이었다. 흰색과 빨간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화사한 테이블보 위에 “돌봄”의 밥상이 차려졌다. 이웃을 돌보는 이웃을 돌보는 손길. 기도회에 오시는 분들이 함께 한 ‘첫 식사’였다. 그동안 다함께 ‘밥 한 끼’하지 못했음이 떠올랐다. 서울에 사는 분들도 있지만, 누군가는 전주에서, 일산에서, 부천에서 오는 길임을 알기에 기도회를 마치면 헤어지기가 바빴다. “밥통”에서 준비한 밥을 함께 나누며, 처음으로 천천히, 그동안 함께 기도해온 이들의 얼굴을 마주했다. 늘 심각한 표정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주로 보아왔는데, 웃는 모습들이 환하고 참 예뻤다. ‘아, 이게 함께하는 밥이 주는 선물이구나.’라는 당연함이 깨달음으로 다가온 거리에서의 배움은 “밥통”이 건넨 선물이다. 서로 밥을 나누는 시간은 눈을 바라보는 시간이며,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며, 웃음을 나누는 시간이자 함께 먹는 식구(食口)가 되는 시간이다. 그날 ‘가톨릭거리기도회’는 처음으로 한 식탁에 앉아 식구(食口)가 되었다.


현장에는 이웃의 곁을 지키는 수많은 ‘돌봄’이 있고, 그 돌보는 손길들을 보듬는 또 다른 ‘돌봄’이 있다. 연대가 낳은 연대, 연대를 위한 아름다운 연대를 바라보며, 희망을 배우고 사랑을 배워나간다. 때로는 버겁고, 직면하는 무력감에 지칠 때 마다 다시 걸을 용기를 내게 되는 것은 선한연대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밥통”과 같은 든든한 동지가 곁에 있기에 나 또한 꿈을 꾼다.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그리고 김용희 님과 이재용 님 두 분이 가족과 함께 한 식탁에 둘러앉아 ‘밥 한 끼’하실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한다. 




[가톨릭기도회에서 토요일마다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 님과 이재용 님을 위해 함께 드리는 기도]


[노동하는 이를 위한 기도_빅토르 하라_con Victor Jara]


일어나라.

저 산맥을 바라보라.

바람과 태양과 물의 원천을, 강물의 흐름을 바꾸는 그대,

네 영혼의 이랑에 씨를 뿌리는 그대여, 일어나라.

너의 두 손을 바라보아라.

너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니

오늘은 우리 미래를 만들어 가는 날

우리를 비참함 속에 가두는 손에서 해방시키시고,

정의와 평등의 왕국이 임하시며,

높은 산길에서 들꽃을 바람에 날리게 하듯 우리에게 불어오시며,

불같은 내 총의 총구를 깨끗이 해주시며,

마침내 당신이 이 땅에서 뜻을 이루시듯

우리에게 힘과 투쟁할 용기를 주소서.

일어서라. 너의 두 손을 보아라.

너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라.

지금도, 우리가 죽는 그 시간에도.

아멘.


“2020년에도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길 위에서 사랑과 기쁨의 여정되기를 응원합니다.”